전산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기업들은 물론 정부 및 공공기관들이 컴퓨터 연도표기 혼선으로 지칭되고 있는 「2000년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20세기 전산시스템을 21세기형으로 바꾸는 데 필요한 일종의 세금으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는 2000년 문제는 컴퓨터가 2000년대와 1900년대를 구별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각종 전산장애와 이에 따른 사회, 경제적 현상을 통칭한다.
특히 이 문제는 전산시스템을 활용하고 있는 기업이나 정부, 공공기관의 당면과제일 뿐더러 사회, 경제적으로 엄청난 파급효과를 지닌 범지구촌적 관심사인 데다 해결해야 할 기간이 불과 8백28일밖에 남지 않은 화급을 다투는 사안이기도 하다.
2000년 문제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을 경우 기업은 생존 자체를 위협받게 되고 정부나 공공기관은 행정업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더러 컴퓨터로 제어되는 원자력발전소, 교통관제시스템, 공장자동화기기 등이 통제불능에 빠져 엄청난 사회적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다.
「밀레니엄 버그」로 일컬어지는 2000년 문제가 빅뱅을 기다리고 있는 시한폭탄처럼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기업이나 정부, 공공기관의 대응자세는 지극히 낙관적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지적하고 있다.
연초에 모 기관에서 국내 1천5백여개 기업 및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2000년 문제에 대한 인식정도를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에 따르면 최고경영층의 경우 전체의 27%가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으며 나머지 70% 정도는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또 한국IBM이 창립 30주년을 기념해 지난 5월경 IBM 메인프레임 「S/390」 사용자 1백40개 기업과 전용시스템 「AS/400」 사용자 4백45개 기업 등 총 5백85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00년 문제 설문조사」에서는 전체 응답기업의 최고경영자 중 70% 정도가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다고 대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조사결과는 이전보다 인식정도가 높아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나 이에 따른 준비를 하고 있는 기업은 20% 정도에 불과해 역시 충격을 던져주었다.
일부 발빠른 기업은 내부적으로 2000년 문제 대책반을 구성, 전산시스템의 분석과 대응방안을 모색하고 있으나 상당수의 기업들은 실질적인 대응책을 아직까지 수립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정부 당국에서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해 총무처, 내무부, 정보통신부 등 관련 부처와 한국전산원 등 전문기관을 동원해 2000년 문제 표준방안 마련에 총력을 경주하고 있다. 그러나 예산 및 인력 등 실무추진에 따른 각종 애로사항으로 2000년 문제 해결작업이 제대로 진척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회, 경제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2000년 문제가 발등의 불로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기업들이 미온적(?)인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는 까닭은 문제 해결책이 어렵고 비용이 많이 소요될 뿐더러 생색이 나지 않는 번거로운 작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또 때가 되면 누군가가 일거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내놓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도 이를 부추기고 있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신종철 송우정보 사장은 『2000년 문제를 손쉽게 해결해 줄 수 있는 「마법사 툴」은 현재 없으며 앞으로도 개발될 전망이 없다』고 잘라 말하며 『200년 문제 해결은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는 지리한 순례의식과 같다』고 말했다.
2000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현재 고안된 기법 중 현행 두 자릿수 연도표기 방식을 네 자릿수로 확대하는 방법이 가장 무난하고 안전한 방안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밖에 기준연도를 설정해 이보다 숫자가 크면 1900년, 이보다 작으면 2000년으로 컴퓨터가 인식하게 하는 윈도윙 기법 등 4, 5개 정도의 방식이 소개되고 있으나 모두 숫자확장 방법보다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현재 가장 확실한 연도표기 방식으로 인식돼 기업들이 채택하기 시작한 네 자릿수 확장방법도 프로그램 수정작업이 번거로울 뿐더러 해당인력도 구하기 힘들어 해결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최근 정부가 2000년 문제 해결에 소요될 비용을 추정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적으로 총 8천8백억원 정도가 소요된다는 것이다. 이는 정부 전산부문 노임단가와 전산시스템 투자액을 기준으로 어림잡아 계산한 것으로 현실성이 부족하지만 국내 처음으로 2000년 문제 해결비용을 산정했다는 데 의미를 갖고 있다. 이는 미국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약 2천억∼4천억달러가 소요될 것이라는 것과 비교할 경우 우리나라는 소요비용을 지니치게 적게 잡고 있는 듯하다.
이와 관련, 삼성생명의 2000년 문제 해결을 총괄지휘하고 있는 윤준효 차장은 『아웃소싱에 의존하고 있는 미국 기업의 전산실정과 대부분 내부인력을 활용하고 있는 국내 기업의 전산실정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내부 전산인력을 활용하고 있는 국내 대기업의 경우 2000년 문제 해결비용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보다 2000년 문제 해결비용이 상대적으로 적다고 해서 문제 해결이 쉽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문제는 국내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부문도 있지만 시스템 벤더는 물론 프로그램 공급업체가 해결해야 할 부문도 상당수 있다. 중대형 컴퓨터 벤더는 물론 운용체계, 데이터베이스 및 전산 관련 프로그램 공급업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2000년 문제에 대응한 신제품을 내놓거나 업그레이드를 실시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추가비용을 요구하고 일부 업체는 이 문제에 대응할 수 없다는 점을 은연중 비추면서 전산시스템을 새로 구축할 것으로 종용하고 있어 국내 기업과의 마찰도 예상되고 있다.
특히 지금까지 국내에서 사업을 전개해온 외국 컴퓨터업체들이 이 문제 해결방식을 지나치게 비즈니스의 기회로만 여기는 데 국내 기업들의 반감이 크다.
정부투자기관의 한 전산관계자는 『외국 컴퓨터업체들이 이 문제를 서비스차원에서 접근하지 않고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로만 접근하는 데 크게 실망했다』고 지적하면서 『이 문제를 원만히 해결해주면 시스템 신, 증설시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 있다는 점을 외국 업체들이 간과하고 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여하튼 국내에서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한국IBM, 한국유니시스, 한국후지쯔, 한국HP, 한국디지탈 등 유명 시스템 벤더는 물론 한국오라클, 한국인포믹스, 한국사이베이스 등 데이터베이스 업체, 여타 응용 프로그램 업체들은 한결같이 2000년 문제 대응 태스크포스팀을 두고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또 2000년 문제 해결책 모색에 앞서 전산시스템의 현황을 분석하고 프로그램 수정방식을 제안하는 컨설팅 및 분석툴을 공급하는 외국계 업체들도 50여개에 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 값비싼 대가를 요구하고 있어 실제 영업기회를 얻은 업체는 극소수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왜냐하면 이같은 컨설팅과 분석툴을 사용하더라도 프로그램 수정은 어차피 국내 기업의 몫이기 때문이다.
현재 2000년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기업은 한국전력, 삼성생명, LG화재, 기업은행, 주택은행 등 20여개사에 달하고 있으며 나머지 대부분의 기업들도 현재 추진팀을 구성해 나름대로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전력공사 2000년 연도표기 수정팀 장철수 과장은 『2000년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산시스템 현황분석을 통해 사태를 파악하고 수정을 요하는 프로그램을 발굴,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프로그램 수정작업이 마무리되면 당초 목적대로 완전한 작업이 진행됐는지 여부에 대해 전체적인 시스템 분석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같은 단계를 거쳐 2000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우선 본격적인 작업에 나서기 전에 최고경영자의 이해를 통해 예산을 확보하고 필요한 인력을 확보해야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는 것이 실무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여기에다 전산시스템 현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분석툴의 선정은 더욱 어렵다는 것. 분석툴이 문제를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을 경우 2000년 문제 해결작업이 수포로 돌아갈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미 단종된 기종과 공급업체가 사라진 프로그램을 사용하거나 소스코드가 없는 경우 사태는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는 것이 전산실무자들의 주장이다.
2000년 문제를 둘러싼 갖가지 난제를 해결해 국내 기업 및 정부, 공공기관의 전산시스템을 21세기형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표준지침과 총체적인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이희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