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관람석] 퍼니게임

「퍼니게임」은 고통스런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당신은 미카엘 하네케의 재능에 매혹되거나 혹은 견디기 힘든 배신감과 모멸감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쪽이 됐든 감독이 의도했던 「폭력이라는 잔인한 고통의 섬뜩한 느낌」이 충실히 전달되었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기존의 영화 속에 담겨진 「폭력」의 상투적인 장치를 기대하는 관객들은 끊임없이 조롱당하면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멋진 반전을 기대하지만 결국 무방비상태에서 또다른 살인을 예고받게 된다. 이 영화가 주는 고통은 아무런 이유나 설명없이 자행되는 폭력과 살인게임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과 그 게임에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퍼니게임」은 관객을 객관적인 관찰자의 입장에 머물수 없도록 강요한다. 살인자들은 관객과 직접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며 관객을 피해자의 입장에 두고 자신들의 「재미있는 게임」에 동참시킨다. 이 심리적인 폭력은 낯설고 당황스럽지만 마지막 반전은 감독의 손을 들어줄 만큼 매력적이다.

휴가를 이용해 요트를 끌고 주말별장에 놀러온 게오르그 가족에게 피터라는 낯선 남자가 찾아온다. 반바지에 하얀 면장갑을 끼고 있는 모습이 다소 불편하게 느껴지지만 그에게서 악의란 결코 찾아볼 수 없다. 피터는 게오르그의 부인인 안나에게 옆집에서 왔다며 계란 4개를 빌린다. 그러나 안나가 준 달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며 태연하게 다시 달라고 요구한다. 안나는 마지못해 계란을 주지만 이번엔 전화를 물에 빠뜨린다. 계속되는 피터의 무례함에 불쾌해진 안나는 나가달라고 요구하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폴이라는 청년까지 가세해 온갖 트집을 잡으며 가족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폴은 게오르그의 다리를 골프채로 부러뜨리고 관객을 향해 눈을 맞추며 「살인게임」의 시작을 알린다. 게임의 내용은 다음날 오전 9시까지 가족을 모두 죽인다는 것. 이 인질 중엔 어린아이도 포함돼 있다. 영화는 폴과 피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다. 물론 극적인 역전의 순간도 있다. 폴과 피터가 방심한 틈을 타 안나는 총으로 피터를 쏘지만 폴은 리모트컨트롤을 이용해 영화를 다시 피터가 죽기 전 상황으로 돌려놓는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관객의 기대를 저버린 냉정하고 극단적인 폭력 앞에 남겨진 해답은 체념뿐이다.

몇몇 관객이 「검열에서 잘려나간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졌을 정도로 사실상 「퍼니게임」에서 눈을 감게 만드는 잔인한 연출장면은 없다. 그럼에도 관객은 시종일관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못하고 잔인한 폭력성으로 인한 심리적인 압박을 느낀다. 이것은 「퍼니게임」이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온 「영화언어」를 사용하기 보다,현 사회를 고발하고 보도하는 「미디어」의 속성에 더욱 가깝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악스러운 살인과 폭력이 더욱 일상적으로 느껴지며 그 공포와 분노가 활실히 각인되는 것이다.

<엄용주,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