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건용(成 建 鏞)
83년 연세대 세라믹공학과 졸업
87년 한국과학기술원 재료공학 박사
89년 미국 코넬 대학교 연구원
89년~현재 한국전자통신연구원 기초기술연구부 책임연구원
21세기에 구축될 정보 고속도로의 성패는 초당 수 테라(10¹²)비트의 정보를 어떻게 보내고 전달된 정보를 얼마나 빨리 처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테라 비트급 전송은 완전 광통신 기술로 해결될 수 있지만 테라 헤르츠급 정보처리는 반도체 기술이 발전해도 불가능할 것으로 예측된다. 반도체 기술 발전추세를 보면 집적도는 2010년께 현재보다 1천배 향상될 수 있지만 클럭 속도는 현재의 3~4배 정도 발전하는데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클럭 속도를 높이는데 필요한 전력의 증가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초전도 디지털 전자소자이다.
초전도 디지털 전자소자가 테라 헤르츠급 정보처리가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전기저항이 없는 초전도성이어서 초전도 미세선을 통해 수㎝ 떨어진 칩들간 신호처리시 지연, 분산, 혼선 등이 거의 없이 피코(10¹²)초의 파형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피코 초의 파형을 생성시킬 수 있는 조셉슨 접합을 이용한 능동소자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 소자는 수 옴 정도의 낮은 출력 임피던스를 가지므로 미세선과의 연결에 문제가 없다. 뿐만 아니라 조셉슨 접합은 신호전압이 1㎷ 정도이어서 1마이크로(10)W 이하의 작은 전력으로 작동한다. 이같은 저전력 특성은 소자집적 및 실장이 용이해 신호전파의 지연을 단축시켜 준다. 셋째 니오븀 삼층접합을 이용한 저온초전도 공정기술이 기존 실리콘 반도체 공정기술에 비해 간단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장점 때문에 60년대 말부터 초전도 디지털 기술을 실용화하기 위한 연구가 시작됐다. 미국 IBM 프로젝트(69~83년), 일본의 상무성 프로젝트 (81~90년) 등이 그 예이다. 이 프로젝트들은 상용화한 기술을 내놓지 못하고 종료됐다. 이유는 제작된 초전도 디지털 소자의 클럭 속도가 1기가 헤르츠 정도로 현재 CMOS와 쌍극성 트랜지스터 회로의 클럭 속도보다 빠르지 않아 액체 헬륨(절대온도 4.2도, 섭씨 영하 2백68.8도) 냉각의 필요성을 정당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속도가 크게 빨라지지 못한 주요인은 전압 상태로 디지털 신호를 코딩하는 반도체 트랜지스터 회로를 모방한 래칭 회로를 선택한 결과다. 지금도 많은 과학자들이 반도체 기술과 경쟁할 수 있는 초전도 디지털 기술개발에 한창이다. 이번 시도는 지난 85년 모스크바 대학의 콘스탄틴 리카레프 교수(현재 미국 뉴욕주립대 물리학과)에 의해 제안된 초고속 조셉슨 접합회로(고속 단일자속 양자 논리회로, RSFQ;rapid single flux quantum logic)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초전도 디지털 전자소자의 기본회로인 단일자속 양자회로의 작동원리는 기존 반도체 트랜지스터 회로의 작동원리와는 다르다. 그림 1과 같은 초전도체로 이루어진 회로를 생각해 보자. 1에서 2로 바이어스 전류 2I를 흘리면 초전도 고리 양편에는 I의 전류가 양분되어 흐른다. 여기서 오른쪽 반고리에 있는 조셉슨 접합의 임계전류(I) 이상인 2I크기의 펄스 전류를 인가하면 조셉슨 접합은 고유의 전류-전압특성으로 상전도 상태가 되어 V만큼의 전압이 걸리고 인가된 모든 전류는 조셉슨 접합이 없어 초전도 상태가 계속 유지되는 왼쪽 반고리 경로를 따라 흐르게 된다. 이때 조셉슨 접합에서는 자속상태(Φ=h/2e=2x10Wb)가 스위칭되면서 전압 펄스 (V=dΦ/dt)가 생긴다. 그 크기는 2IR과 근사한 값을 가지며, 시간은 τ=Φ/2IR이 된다. 고온초전도 조셉슨 접합의 경우 이 값이 피코 초에 이르러 테라 헤르츠급의 스위칭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림 2는 고온초전도 박막을 이용한 단일자속 양자회로와 등가회로이다. 여기서 디지털 비트는 초전도 고리 안쪽으로 들어오거나 나가는 단일자속 양자의 형태로 저장되며, 이 초전도 고리는 조셉슨 접합들로 끊어져 있어 양자간섭계로 작동한다. 따라서 조셉슨 접합은 고리를 양자간섭계로 만들어 고리 안에 단일자속 양자가 잡히거나 빠져나간 두 안정된 자속양자 상태("0"과 "1")를 만들고, 단일자속 양자가 고리 내에 잡히거나 빠져나가는 스위치 역할을 한다. 단일자속 양자회로내에서 디지털 정보의 초고속 처리가 끝나면 직류 초전도양자 간섭소자(dc SQUID)를 사용하여 출력된 자속상태를 전압으로 변환시킨다. 이렇게 변환된 수백 마이크로볼트의 전압신호를 수 ㎷로 증폭시켜 구리선으로 출력되고 이 신호는 다시 가격이 저렴한 상온 반도체 증폭기로 표준 반도체 트랜지스터 전압인 수 V로 증폭된다.
초전도기술은 크게 초전도 상태가 시작되는 임계전이온도가 절대온도 30도 이하인 니오븀 금속류를 주로 이용하는 저온초전도 기술과 임계온도가 절대온도 90도 이상인 구리계 산화물을 이용하는 고온초전도 기술 등 두가지로 나뉜다. 저온초전도 공정기술로 제작된 최근의 각종 단일자속 양자회로에 대한 실험결과 초전도 디지털 전자소자의 초고속 특성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 미국 하이프레스사에서 1.5미크론 기술로 제작된 단순회로의 경우 3백70기가 헤르츠에서 작동되는 것이 시현됐고 3.5미크론 기술로 수백개의 셀로 구성된 비교적 복잡한 회로는 20~30 기가 헤르츠에서 작동하는 것이 확인됐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0.5미크론 이하 기술로 제작되는 복잡한 집적회로의 클럭속도는 2백 기가 헤르츠 정도 될 것으로 예측된다.
단일자속 양자회로의 또 다른 장점은 소모전력이 극히 작다는 점이다. 단일자속 양자를 변환시키는데 드는 전류는 2백 마이크로암페어, 단일 비트 논리동작에 서너개의 자속변환이 일어나므로 기본 에너지 소모는 비트당 10~18 줄 정도이다. 요즘 사용하는 단일자속 양자회로는 전력소모가 기본 수준보다 10배 정도 낮다. 30 기가 헤르츠 회로의 전력소모는 셀당 0.3 마이크로와트 정도이고, 이 값은 클럭 주파수에 비례해 증가하게 된다. 따라서 과외의 전력소모를 포함하더라도 단일자속 양자회로의 전력소모는 훨씬 낮은 주파수에서 작동하는 CMOS 회로에 비해 1백분의 1에서 1천분의 1 정도 낮은 값을 가진다. 저온초전도 단일자속 양자회로의 실용화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섭씨 영하 2백68도로 냉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고온초전도 조셉슨 접합은 특성상 단일자속 양자회로에 아주 적합하다. 이론적으로 1 테라 헤르츠 이상의 클럭 주파수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고온초전도 디지털 전자소자 기술은 현재 두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열적 요동이 커서 열적으로 여기되는 자속변환 즉, 디지털 오류율이 높다. 이 오류를 줄이기 위해선 접합의 임계전류가 저온초전도 회로보다 커야 한다. 둘째 문제점은 고온초전도 조셉슨 접합의 재현성이다. 단일자속 양자회로는 최적 설계시 +30%의 임계여분을 갖는 회로 인자값 범위에서만 작동가능한데 열적 요동은 이 범위를 더욱 좁힌다. 결국 칩당 2천개 정도의 조셉슨 접합이 집적된 최소 규모의 단일자속 양자회로는 임계전류의 기하 평균 분산도가 4%이하이어야 한다. 현재로는 저온초전도 기술은 이 한계를 만족시킬 수 있으나 고온초전도 기술에서는 아직 불가능한 상태이다. 고온초전도 단일자속 양자회로 기술이 실제 상용화하기에는 앞으로 10여년의 연구기간이 더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에 저온초전도 단일자속 양자회로 기술이 우선 개발돼야 할 것이다.
고온초전도 박막기술은 초전도 전자소자 응용의 핵심기술로 인식되어 많은 연구가 이뤄졌고 현재 세계 1백여개 연구실에서 고온초전도 박막을 제작하고 있다. 단일자속 양자회로를 고온초전도 박막을 사용해 제작하고자 하는 노력도 최근 미국, 일본, 유럽 등지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주로 스위칭 네트워크와 신호처리 분야를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일본도 국제 초전도 기술센터가 고온초전도 박막을 이용한 단자속 양자회로를 중점 연구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최근 고온초전도 단자속 양자회로가 한국과학기술연구원과 인천대학교의 공동연구로 처음 제작됐으며, 한국전자통신연구원 기초기술연구부는 세계 처음으로 액체 질소온도에서 작동하는 단일자속 양자회로의 기본 셀을 고온초전도 다층박막기술로 시현한 바 있다.
현재 초전도 디지털 전자소자가 시현된 시스템은 레이더 및 통신 시스템용 A/D 변환기와 초광역 레이더의 특수파형 생성을 위한 D/A변환기이다. 이는 무한한 디지털 전자공학 시장의 극히 일부분에 해당한다. 그러나 칩당 30만개의 조셉슨 접합 집적도를 높은 수율로 실현할 수 있는 1미크론 기술이 개발된다면 훨씬 가시화한 응용분야가 열리게 된다. 우선 초고속 디지털 스위칭을 들 수 있다. 초전도 디지털 전자소자 기술은 디지털 TV와 통신 시스템에서 디지털 신호처리와 영상처리, 디지털 푸리어 변환 등과 같은 특정 분야에 유일한 해결책으로 보인다.
초전도 디지털 전자소자의 또 다른 응용분야는 저전력 특성을 이용한 거대용량 컴퓨터이다. 폰-노이만 방식의 컴퓨터는 단일자속 양자회로에서 속도를 높이는데는 가장 부적당한 컴퓨터일 것이다. 이 컴퓨터는 프로세서와 메모리간의 데이터 교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 때의 최대 교환속도는 적어도 광속의 신호전파 시간에 의해 결정된다.(유전율이 4인 보통의 환경에서 1㎝의 거리당 70피코 초). 마이크로프로세서와 메모리 간의 평균거리가 10㎝일 때 이 인자 자체로 프로세서-메모리 교환속도는 1Gbps정도로 한정될 것이다. 이것이 1나노 초보다 훨씬 짧은 클럭 사이클을 만들지 않는 이유이며 단일자속 양자회로 기술의 초고속 장점도 빛을 잃게 된다. 그러나 대규모 계산일 경우 초전도 디지털 회로는 반도체와의 경쟁에서 또 다른 결정적인 장점을 가진다.
단일자속 양자회로는 가장 빠르고 간단하면서도 전력소모가 작은 디지털 LSI 기술일 뿐 아니라 동일한 설계기준을 사용하는 어떠한 회로보다 집적도가 높게 될 것이다. 게다가 고온초전도 기술이 성숙되면 액체질소온도에서 작동하는 단일자속 양자회로 시스템이 가능해 냉각비용이 절감되고 속도는 더욱 빨라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초전도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함께 적절한 산업화 노력이 수반되면 단일자속 양자회로는 고성능 컴퓨팅, 광대역 통신, 정밀 고주파 기기 등의 선도적인 디지털 기술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