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유학했다. 유학 당시 학교에는 일본학생들도 꽤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이 회사에서 파견된 사람들로 우리처럼 공부를 심각하게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동양인인 우리에게 물어오는 등 그들에게 우리는 거의 우상(?)이었다.
지난 90년 말 3개월 동안 일본 센다이 소재 동북대학에 교환교수로 파견될 당시 나는 2시간 남짓했던 비행시간 동안 술을 많이 마셨다. 내게 있어 일본행이란 거의 유람이었고 일에서 해방되는 기분으로 술이 참 잘도 넘어갔다.
그러나 일본이 전자대국으로 성장했음을 피부로 느끼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별 볼일 없이 3개월이 지나 귀국이 임박했을 무렵 1592년 감히 우리를 침공하고자 했던 풍신수길이란 자를 볼 생각으로 오사카를 방문했다. 오사카에서 내 눈에 빨리듯 들어온 것은 성벽에 병풍처럼 둘러쳐 있던 풍신수길의 일대기 중 임진왜란의 모습이었다. 무작정 활과 창을 든 조선군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일본군의 모습은 마치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인디언과 기병대 모습을 연상시켰다.
청의 도움으로 풍신수길을 물리친 것을 두고 일부 사학자들은 우리가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기병대와 인디언의 싸움처럼 그려진 그 그림을 보고 조총을 가진 일본군은 절대 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또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일본군 조총에 맞아 죽어갔는가를 생각한다면 임진왜란을 이순신 장군을 중심으로 우리의 저력이 표출된 예라고 자랑하기보다 우리가 조총을 만들지 않았음을 탓해야 할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국민의 영웅으로 알려진 지 3백여년 후 우리는 일본군의 함포사격으로 나라를 잃고 말았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NHK가 제작한 「전자입국의 일본」이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다. 그 프로에서 『어떻게 일본이 미국의 기술을 따라잡고 전자산업에서 우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됐느냐』는 질문에 대한 일본인 교수 부인의 대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부인은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2차대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유를 기술부족으로 분석했고 어떻게든 미국의 새로운 기술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몰두했으며 그 결과 10년도 채 안돼 미국보다도 전자제품을 더 잘 만들 수 있게 됐다』고 대답했다. 나는 스탠퍼드에서 공부하던 78년 당시 각종 반도체 관련 세미나에 「일본인과 카메라는 출입을 금함」이라는 팻말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아니 그렇게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지금 우리 주위에서는 하루에도 30개 이상의 중소기업이 무너지고 있으나 외제 물건만을 판다는 모 백화점의 명품관은 발 디딜 틈이 없다. 기성세대들의 방황은 우리의 장래를 어둡게 한다. 그렇지만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이 기회에 사리사욕을 앞세우는 사람은 자신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사회에서 그런 사람들은 몇 안된다.
나는 임진왜란 후 조선이 왜 조총 만들기를 소홀히 했을까에 대한 대답을 얻지 못한 채 귀국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는 지금 적진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자꾸만 술이 먹혔다. 김포공항에 내릴 때쯤에는 3개월 전 일본땅을 밟았을 때보다 더 취해버렸다. 지금도 나는 가끔씩 마치 적진 속에서 조총을 만들려고 애쓰는 내 자신을 본다.
<대학산업기술지원단장 주승기 서울대 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