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자산업의 견인차 역할을 맡고 있는 전자부품업계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자금지원 이후에 불어닥칠 파장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IMF의 긴급자원 지원이 현재 우리나라 경제현안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경제정책들이 IMF의 요구조건에 상당히 좌우될 수밖에 없어 산업전반에 걸쳐 폭넓은 구조조정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품업계들 중에서도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업계는 IMF지원 이후의 문제를 염두에 두면서 새로운 판을 짜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세계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시장은 현재 과잉상태다. 국내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업계는 세계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입장이어서 이같은 과잉생산에 따른 상당 부문을 책임져야 할 입장에 놓여 있다. 따라서 반도체업계와 디스플레이업계는 IMF의 입김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크게 걱정하고 있다.
반도체업계와 디스플레이업계는 우선 IMF가 설비투자와 사업구조조정 부문에 대해 간섭을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특히 일본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을 경우 이 분야에서 우리의 경쟁상대인 일본업체들이 일본정부에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할지 우려 속에서 지켜보고 있다. 따라서 반도체업계와 디스플레이업계는 IMF 관련한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등 앞으로의 환경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나름대로 대응전략 마련에 분주하다.
「오늘의 투자가 내일의 수익」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투자에 따른 이익을 보장해오는 것으로 보였던 반도체산업은 최근의 금융 및 외환 위기가 다른 업종보다 뼈아프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 반도체 업체들이 무엇보다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발등의 불은 내년도 투자에 소요되는 자금 조달 방안. 그동안 시설투자 재원의 절반 이상을 외자에 의존해온 국내 반도체업체들의 경우 국가 및 기업의 신용도가 급락하면서 예년에 비해 훨씬 많은 금융비용 지출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미국의 대표적인 메모리 반도체 업체인 마이크론사의 스티븐 애플턴 회장이 최근 『한국에 대한 IMF긴급 지원자금이 메모리 분야의 세계시장 점유율을 확대하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면 미국이 자금지원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발언, 국내업체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이 문제는 특히 동부그룹의 메모리반도체 사업 추진과 아남그룹의 FAB공장 설립, 기존 반도체3사의 설비투자 의욕을 냉각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더욱이 최근 메모리 시장의 주력상품이 16MD램에서 64MD램으로 급속히 세대교체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할 경우 이번 금융위기가 어렵게 쟁취한 메모리분야의 주도권을 일본이나 미국에 맥없이 넘겨주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98년과 99년은 수익보다는 투자가 우선돼야 하는 시기이면서 국내 반도체산업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시기』라며 투자 여건 악화가 가져올 결과에 큰 우려를 표시했다.
이와 함께 제조설비의 대부분을 미국이나 일본산에 의존하고 있는 반도체업체에게 지워진 또 하나의 짐은 원화가치 하락에 수반되는 투자비 부담이라고 할 수 있다. 메모리반도체 가격의 급락으로 가뜩이나 채산성이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원화가치 하락에 따른 투자비용 증가라는 이중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는 형편인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위기가 대표적인 수출산업인 반도체 부문에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가능성도 조심스레 점쳐지고 있다. 고성장, 고수익 구조에만 길들여진 반도체 업체들이 「생존」을 위해 뼈를 깎는 구조조정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이러한 노력들이 결국 경쟁력 강화라는 측면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반도체업계가 안고 있는 고민은 곧바로 박막 트랜지스터 액정표시장치(TFT LCD)업계에 곧바로 영향을 주고 있다. 반도체업계와 TFT LCD업계는 한몸이기 때문. LG전자를 제외하고 삼성전자와 현대전자는 TFT LCD생산부문을 반도체부문에 포함시키고 있다. 따라서 반도체부문에서 투자가 줄어 든다는 것은 TFT LCD부문 투자도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천안 TFT LCD공장 증설에 8천억원을 투자한 것을 포함, 올해 반도체부문의 투자가 1조8천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그룹이 최근 내년 투자규모를 발표하면서 반도체부문에 2조원 투자한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97년 투자액보다 30% 가량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따라서 TFT LCD부문의 투자액도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LG전자와 현대전자도 이미 신증설계획을 잡아놓고 투자하고 있어 별다른 문제는 없으나 새로운 대규모 투자는 엄두도 못내고 있는 형편이다.
특히 TFT LCD업계가 우려하는 것은 우리가 일본의 자금지원을 받을 경우 어떠한 형태로든지 일본측의 입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TFT LCD업계는 우리의 강력한 경쟁자인 일본업체들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TFT LCD업계는 이번 외환위기로 관련부문 투자를 실기해 생겨난 미세한 차이가 몇 년 후에는 경쟁 상대국인 일본에 비해 엄청나게 뒤떨어지는 결과로 나타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국내업체들이 외환위기로 인해 주춤하고 있는 사이 일본업체들이 대대적인 투자계획을 마련해 집행할 경우 차세대 부문에선 곧바로 뒤처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TFT LCD업계는 외환위기와는 별도로 세계시장에서 일본과 경쟁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기까지는 좀더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할 시점에서 터진 외환위기를 안타까워하며 내부적으로 다각적인 대책마련을 하고 있다.
디스플레이업계에도 반도체업계의 고민만큼 비슷한 무게로 압박을 받고 있다. 디스플레이업계는 지난해까지 겁없이 세계 곳곳에 진출, 생산라인을 증설함으로써 일본을 앞지르고 1위의 생산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95년과 96년기간 중 업체들의 투자를 보면 브라운관 3사가 16개 라인을 신증설했다. 삼성전관은 8개 라인을 신증설했으며 오리온전기와 LG전자도 각각 4개 라인씩을 신 증설했다.
이같은 무모한 투자가 곧바로 외환위기를 맞이한 지금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해외공장에 투자하면서 차입한 부채가 환율인상 폭만큼 이자 부담도 늘어나면서 채산성을 악화시키고 있다.
또한 외환위기로 인해 해외에서 차입을 할 수도 없어 원활한 자금회전을 가로막고 있다. 따라서 브라운관업계는 내년도 투자계획조차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브라운관 업계는 가격인하와 외환위기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생산라인의 개보수 등 필요한 부문에만 투자할 뿐 신규 투자계획을 세울 엄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삼성전관은 내년도 투자계획을 세우면서 유럽에 진출하려던 당초 계획을 잠정적으로 보류한 상황이다. 오리온전기도 내년에 그룹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모로코 프로젝트 이외에 베트남에 1개라인을 증설하는 계획을 보류하기로 했다. LG전자도 영국 윈야드의 브라운관공장 건설과 중국 長沙공장 증설 계획을 추진한다는 방침만 세워놓고 있다.
브라운관업계는 투자계획의 축소와 함께 사업구조 조정에도 적극적이다. 이미 채산성이 맞지 않는 14인치 CDT 등 저부가가치 제품들의 생산라인을 축소하거나 해외로 이전하는 대신 대형제품 중심으로 생산라인을 전환하고 있다.
브라운관업계는 아울러 생산성혁신 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금보다 원가를 50% 가량 절감함으로써 이같은 위기를 돌파해 나간다는 전략을 세우고 과감한 체질개선에 나서고 있다.
이번 외환위기로 촉발된 IMF의 자금지원을 받은 상황에서 반도체업계와 디스플레이업계는 투자축소와 사업구조조정에서 피할 수 없게 됐다. 특히 두 분야에선 미래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막대한 투자를 생각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반도체업계와 디스플레이업계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IMF의 입김을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할 경우 곧바로 우리의 전자산업경쟁력이 추락하게 될 것으로 우려된다. 따라서 최대한 이 분야에서만큼은 IMF 및 일본의 입김을 최소화하는 데 온힘을 기울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원철린, 최승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