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긴급진단 신음하는 소형가전산업 (중)

「단위 생산량 1억개와 2만개 간의 경쟁력.」 다국적 기업인 필립스와 국내 중소가전업체가 전기다리미 한 모델당 생산하는 평균물량이다. 이같은 단위 생산량에서부터 국내 업체들의 경쟁력은 판가름났다는 것이 관련업계의 지적이다.

『기본물량이 억단위인 외산과 고작해야 몇만개인 국산은 생산설비에서부터 연구개발(R&D)투자에 이르기까지 하늘과 땅 차이이고 최종소비자들에게 돌아가는 완성품의 품질은 안 봐도 뻔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같은 지적에 대해 중소업체 관계자들은 『그동안 쌓아온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있다. 단지 홍보가 적어 브랜드력이 취약할 뿐이지 결코 품질이 뒤떨어지는 것은 아니다』고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반박하는 중소업체들도 가격경쟁력이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위축되기는 마찬가지다.

단위 생산량이 따라주지 않으니 자연히 단가가 높아지고 단가가 높으니 가격덤핑으로 공세하는 외산에 밀려 판매가 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투자비도 못 건지는 상황에서 출혈경쟁을 계속해야 하는 사면초가의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많은 중소업체들이 전문아이템과 자체 기술력 없이 대기업에 의존해 단순 조립생산하면서 낡은 사업구조와 주먹구구식 생산방식으로 연명해왔다. 디자인과 기술개발에 투자를 하고 생산설비를 현대식으로 바꾸면서 경쟁력을 강화해 나가기보다는 어쨌든 자금을 빨리 회전시켜 돌아오는 어음을 막고 인건비와 원자재비를 충당하기에 급급했던 것이 현실이다.

결국 이런 업체들은 지난 몇년 간 외산침투과정 속에서 하나둘씩 도태됐다. 특히 수입침투도가 80∼90%에 이르는 전기다리미, 전기면도기, 헤어드라이어 등을 생산하던 업체들은 그 수가 품목별로 20∼30여개에서 3, 4개로 줄어들었고 외산붐에 부응해 뒤늦게 커피메이커, 전기토스터, 핸디형 청소기를 생산하면서 소형가전시장에 참여한 중소업체들은 다국적기업들의 저가공세에 밀려 문을 닫았다.

현재 남아있는 우림전자, 유닉스전자, 한일전기, 신일산업, 대웅전기산업 등은 나름대로 규모를 갖추고 전문아이템을 개발, 자체 브랜드와 유통망을 개척해 그야말로 국산 소형가전의 명맥을 유지해가고 있다. 여기에 우신전자, 명성가전, 선보정밀, 다코전기 등 비록 브랜드는 없으나 대기업에 OEM방식으로 제품을 공급하면서 사업을 키워온 몇몇 업체들을 포함하더라도 국내에 제대로 된 소형가전업체들은 50개에도 못 미치고 있다.

중소가전업체들이 안고 있는 또다른 문제는 판로확보가 극히 어렵다는 점이다.

고비용, 저효율의 유통구조라는 대리점체계도 미비해 재래시장에 의존하고 있는데다 그나마 가전양판점들로 거래를 확대하고 있지만 브랜드 인지도가 낮다는 이유로 소비자가격의 절반 이하로 납품할 것을 요구받고 있어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최근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대형할인매장 등 신유통업태를 뚫고 들어가려 해도 큰 할인폭과 마진율을 동시에 보장해줘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이 기회조차도 외산에 뺏기고 있다. 이에 홈쇼핑TV나 카드통신판매 등으로 틈새영업을 펼쳐나가고 있지만 아직까지 물량이 많지 않은 편이고 이익도 적다.

이밖에 국내 중소업체들은 진공청소기, 커피메이커 등 일부 소형가전제품에 부여되는 특별소비세가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특히 국산제품은 각종 마진이 붙은 공장도가격의 19.5%를 특소세 및 교육세로 내고 있지만 외산제품은 수입단가에 이 세금이 붙어 국내 업체가 더 많은 세금을 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외산에 비해 가격경쟁력이 떨어지는 한 요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 외산이 국산보다는 비교적 쉽게 형식승인을 받을 수 있게 돼 있어 사후관리도 안되는 저질 수입품이 난립하고 있다며 관련 법규의 개선을 요구했다. 정부의 각종 지원금도 자격조건이 까다롭고 어느 정도 규모가 갖춰진 업체에 부여되는 터라 정말 필요한 소기업에 갈 수 있도록 자격요건의 완화도 필요하다고 애로사항을 토로하고 있다.

<정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