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업계가 피부로 느끼는 경제침체의 영향은 우선 환율상승에 따른 수익성 약화이지만 조만간 가시화할 수요감축을 더욱 두려워하고 있다. 여기에다 국내 금융시장 혼란으로 모든 기업이 겪고 있는 자금압박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내년이 최고 위기의 해가 될 것으로 컴퓨터업계는 내다보고 있다.
컴퓨터 업체들은 대외적으로는 경제가 어려울수록 인력절감 및 경쟁력 향상의 수단이 되는 전산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측면을 미국의 예를 들어 역설하고 있으나 그 효과에 대해서는 별로 기대하지 못하는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컴퓨터업체들은 최근 일차로 작성한 내년도 사업계획을 전면 수정해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상한 생존전략 차원의 사업계획 마련에 착수한 상태이다.
중대형 컴퓨터를 비롯한 정보기술(IT)수요는 정부 및 민간기업의 대대적인 긴축정책에 따라 공공부문, 민간부문 할 것 없이 크게 위축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전망이다. 특히 주요 IT시장의 하나인 금융부문은 앞으로 가장 큰 변화가 예상되는 분야인 만큼 신규수요를 기대하기가 더욱 어려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동안 시스템통합(IT)을 비롯한 국내 IT산업은 지난 2∼3년간의 높은 성장에 따른 관성을 받아 그런대로 꾸려 왔지만 올 3.4분기 이후부터는 그 영향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상태이다.
하드웨어의 경우 상당기간 경기침체를 느껴온 PC 등 개인용 컴퓨터 및 주변기기 업체들보다는 그동안 높은 성장세를 구가해 왔던 서버 등 중대형컴퓨터업계가 받는 경기침체의 체감지수가 상대적으로 크다. 그나마 버텨줬던 재벌기업마저 전산투자를 대폭 축소하기로 함에 따라 상당수가 매출부진에 허덕이고 있으며 환율상승에 따라 환차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등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상태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대기업의 경우 환차손이 1백억원을 넘고 중견업체들도 수십억원에 달하는 등 판매수익의 대부분을 환차손 메우는데 쓸어부어야 할 판』이라고 걱정하고 있다.
PC 등 개인용컴퓨터 부문도 결코 사정이 낫지는 않다. 기업시장은 중대형컴퓨터와 마찬가지로 교체수요마저 크게 기대할 바 못되는 데다 일반 국민들의 주머니사정이 나빠지면서 가정시장 수요마저 곤두박질 치고 있다. 삼보컴퓨터가 「체인지업 PC」라는 승부수를 띠운 것은 그나마 적극적인 불황타개책을 펼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주변기기 업체 등 대부분 전문업체들은 축소지향 일변도의 전략을 마련하고 있는 상황이다.
매년 30% 이상의 성장을 지속해온 시스템통합이나 소프트웨어 산업은 90년대 이후 최대고비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주로 전산투자 위축에 따른 수요 감소에서 비롯된다. 이미 일부 SI업체들은 이미 수주한 공공기관이나 민간기업의 전산화 프로젝트마저 취소 또는 연기요구을 받고 당혹해 하고 있다.
특히 고급인력 중심의 산업구조를 갖고 있는 이들 SI나 소프트웨어산업은 그동안 기업경쟁력이 우수인력 확보에 있다는 판단에 따라 꾸준히 인력채용을 늘려온 터여서 앞으로 잉여인력 처리문제를 놓고 한차례 회오리 바람이 일 것으로 예고되고 있다.
소프트웨어 벤처기업들 역시 그동안 벤처열풍을 타고 기대이상의 선전을 해 왔지만 더 이상보호막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최근들어 벤처거품에 대한 인식마저 확산되면서 상당수 업체들이 이미 어려움에 빠져 있는 상황이다.
컴퓨터 업체들은 이같은 어려움 속에서 인터넷이나 전자상거래 등 일부 시장에 기대를 하고있다. 이들 시장이 발아기에 있는 만큼 그나마 영향을 적게 받지 않을 까하는 기대 때문이다. 또 경제상황이 어려워진 만큼 다양한 요소를 종합적으로 분석해주는 의사결정지원시스템 등의 시장이 다소 활기를 띨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또 외국업체들과 경합을 벌이고 있는 그룹웨어 분야의 핸디소프트나 나눔기술, 워드프로세서의 한글과컴퓨터 등 개발사들은 환율상승에 따른 외국업체들의 제품기격 인상으로 가격경쟁력이 높아지는 효과를 기대하기도 한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 컴퓨터업체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이들 업체는 무엇보다 환율상승을 어떻게 흡수하는가 하는 문제가 현재의 최대 관심사이다. 이들 업체로서는 가격 인상 요인이크나 경쟁상황과 가격인상에 따른 비난을 의식, 신중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오토데스크코리아의 김일호 사장은 『재고를 줄여 일단 환율충격을 최소화하고 있으나 이대로 지속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며 『오토데스크와 딜러, 디스트리뷰터가 조금씩 환율상승 폭을 흡수하는 방안을 협의중』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노벨의 이광세 사장도 『대리점의 가격 인상요구가 크나 경쟁업체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컴퓨터업계는 지금의 총체적인 위기를 장기적으로 경쟁력을 높이는 기회로 활용하겠다는 강한의지를 다지고 있다. 임원들에게 제공했던 골프장 회원권을 회수, 매각처분하는 대기업들이 잇따르고 있고 전직원을 대상으로 한 경비 줄이기 운동도 과거처럼 구호 차원이 아니라 직원들이 오히려 앞장을 서고 있는 상태다.
일부 기업은 근무시간을 종업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연장하기도 했다. 근무시간 연장이 가져오는 생산성 향상효과도 있지만 위기에 대한 공감대를 넓히는 효과가 더 크다는 관계자들의 말이다.
불황을 이기기 위한 컴퓨터업계의 몸부림은 우선 내년도 사업계획 축소로 나타난다. 핸디소프트나 나눔기술 등 소프트웨어 업체들은 모두 성장목표를 보수적으로 설정해 놓고 있으며 LG소프트 등 성장위주의 전략을 세웠던 일부 업체들은 사업계획을 전면 재수정하고 있다.
컴퓨터업체들은 변화를 흡수할 수 있도록 기업뼈대도 재구성하고 있다. 다우기술은 수요위축을 영업력 제고로 돌파하기로 하고 고객밀착형으로 바꾸는 조직개편안을 마련, 조만간 시행에 들어갈 예정이며 삼보컴퓨터도 임원조직을 슬림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조직개편을 이미 단행한 바 있다.
수츨시장 개척은 컴퓨터업체들의 마지막 희망이자 최선의 목표이기도 하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할 것 없이 내수시장의 불황을 수출시장 개척으로 극복한다는 공격적인 전략을 추진해가고 있는 중이다. 특히 최근 급등하고 있는 환율이 수출경쟁력을 높여주는 긍정적인 효과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업체들은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삼보컴퓨터는 해외시장 개척을 최대목표로 설정, 비록 중저가 브랜드지만 해외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고 핸디소프트, 넥스텔 등 소프트웨어업체들도 일본, 미국 등 해외 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주력해 나갈 방침이다.
특히 내수시장에만 매달려온 소프트웨어 업체들의 해외진출 움직임은 정부의 지원정책과 맞물려 올해 가장 큰 변화의 모습으로 평가된다. 최근 마감한 소프트웨어해외지원센터 입주업체 신청에서도 28개 업체가 참여, 해외진출에 대한 강한 의욕을 보였으며 이미 개별적으로 외국에현지법인 설치 등의 방법으로 해외진출을 추진하는 업체들도 적지 않다.
소프트웨어 업체들이 해외시장 개척에 적극 나서면서 올해 소프트웨어 수출실적도 크게 늘었다.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에 따르면 올해 소프트웨어 수출은 총 5천2백60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돼 지난해보다 2백50% 가량 증가가 예상된다. 수출품목도 다양화돼 패키지 소프트웨어도 그룹웨어, 게임 등 저변이 넓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SW협회는 특히 이같은 추세가 업계와 정부의 노력이 가시화되는 내년에는 더욱 활발해져 내년도 SW수출이 1억 달러를 넘을 것이라는 밝은 전망을 내놓고 있다.
컴퓨터업체들은 기존 시장의 부진을 타개하기 위한 신사업 진출에도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LG전자가 HPC를 전략사업으로 육성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나눔기술, 한국IBM 등 일부업체들은 신규시장 진출을 내년도의 주요 사업계획으로 상정해 놓고 있다.
특히 경제위기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공동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찾자는 움직임이 가시화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이에 따라 하드웨어업체와 소프트웨어 업체들 간의 이업종 제휴는 물론 동종업종 또는 경쟁사간의 기술결합 등 전략제휴 움직임도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푸시기술을 보유한 NCK텔레콤과 번역소프트웨어업체인 유니소프트가 기술,영업분야에서 전략제휴했고 방화벽 업체인 아이에스에스가 컴퓨터바이러스 백신 공급업체인 안연구소와 손을 잡은 것도 이런 전략의 일환이다.
컴퓨터업체들의 불황극복 전략은 아직 초보적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비교적 긍정적인 것은 이 난국을 극복하려는 마음가짐과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무장돼 있다는 점이다. 컴퓨터업계 한 관계자는 『가장 위험한 것은 위기상황을 위기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며 『국내 경제의 인프라가 아직 건강하고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려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펼쳐지는한 앞날이 그렇게 어둡지는 않다』고 희망섞인 전망을 내리고 있다.
<이창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