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특집-에어컨] 가전 불황 강풍으로 몰아낸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부 고소득층의 사치품으로 인식되어왔던 에어컨은 이제 왠만한 가정에서 사용될 정도로 생활필수품으로 자리잡고 있다. 최근들어 급속한 보급률 증가로 한 여름철 전력난을 심화시키는 원인제공자로 매년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도 사실이지만 가전업계 입장에서는 둘도없는 효자품목이다.

컬러TV, VCR와 냉장고, 세탁기 등 전통적인 가전산업은 좀처럼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에어컨은 해마다 높은 성장세를 기록하며 초고속 신장세를 거듭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올해 국내 에어컨 시장은 1백36만여대가 판매돼 1조7천억원 규모인 것으로 추정된다. 시장규모가 1백10만여대, 1조2천억원이었던 지난해보다 크게 증가했다.

내년에도 에어컨시장은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1백50만대, 2조원 상당 규모를 형성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고속 성장을 바탕으로 에어컨은 2년 연속 가전 최대 품목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동안 국내 가전시장에서 최대 품목이었던 컬러TV는 지난해 에어컨에 최대 품목의 자리를 내줬는데 올해에는 그 격차가 더욱 벌어졌다.

지난 94년까지만 해도 에어컨은 연간 38만대 규모로 여름 한 철만 장사하는 상품에 불과했다. 그런데 94년 여름 불볕더위를 겪으면서 95년을 기점으로 판매량이 크게 증가해 95년에 80만대, 96년에 1백10만대 등 폭발적인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제는 소비자들이 에어컨을 생활필수품으로 여길 정도로 에어컨의 보급이 대중화되고 있다. LG전자가 최근 에어컨을 보유하지 않은 소비자 3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에어컨이 사치품이 아니라는 응답율이 65%에 이른 것은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 만도기계의 시장 조사에 따르면 에어컨을 구입한 소비자의 절반이 월 소득 3백만원 이하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만큼 국내 에어컨시장이 이제 성숙기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보급율은 올해 25%를 기록했는데 지난 94년에 10%를 시작으로 해마다 5%포인트 정도 증가하고 있다. 더욱이 국내 에어컨 수요는 대부분 신규 수요로 시장 잠재력이 여전히 풍부하다.

특히 국내 에어컨 판매량의 55%를 차지하는 거실용 패키지에어컨은 여름철만 되면 없어서 못팔 정도로 호조를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에어컨업체들은 국내 시장에서는 룸에어컨 보다 패키지에어컨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국내 에어컨 시장이 이처럼 폭발적으로 성장하자 국내 에어컨업체들이 앞다퉈 생산을 확대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이제 미국, 일본에 이어 에어컨 생산 대국으로 성장했다.

수출물량을 포함해 국내 에어컨 생산대수는 94년에 1백10만대에서, 95년에 1백95만대로 증가했다. 올해에는 2백60만대, 내년에는 3백10만대에 이를 전망이다.

연간 3천4백만여대인 세계 에어컨 생산량의 9.2%에 이르는 물량이 우리나라에서 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에어컨시장의 고속 성장으로 덕을 보고 있는 것은 물론 가전업체들이다. 가전업체들은 전반적인 가전제품 보급율이 포화되면서 위기 상황에 직면했는데 에어컨 시장이 활성화하자 상당한 힘을 얻고 있다.

LG전자, 삼성전자, 대우전자는 에어컨 시장을 겨냥해 생산 규모를 매년 확충하고 있으며 컴프레서, 모터 등 핵심 부품을 독자 개발하기 위해 연구개발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에어컨이 유망사업으로 떠오르자 이 시장에 뛰어드는 업체들도 최근 부쩍 늘어나고 있다. 2,3년전만 해도 국내 에어컨업체는 LG전자, 삼성전자 등 가전업체와 대우캐리어, 만도기계, 두원냉기, 경원세기, 범양냉방 등 제조업체 일색이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동양매직 등 신규업체들이 가세하더니 올해에는 린아이코리아, 해태전자 등 10여개 업체, 내년에도 대성쎌틱 등 5,6개 업체가 신규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여기에 내셔널, 산요, 히타치, 미쓰비시, 다이킨 등 국내 업체를 통해 우회 진출하는 일본 업체까지 합하면 무려 30여개의 업체가 난립할 것으로 보인다.

에어컨시장은 예년에 볼 수 없이 치열한 격전장이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 것이다.

그 양상은 먼저 유통망 확충 경쟁으로 나타날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시장 3위 경쟁을 벌이는 만도기계와 대우캐리어, 대우캐리어와 결별해 독자 사업을 꾸려나갈 대우전자 등이 기존 유통망을 놓고 치열한 확보 경쟁을 벌일 것으로 관측된다.

또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가격 인하 경쟁도 새로 전개될 전망이다. 참여 업체들이 많아져 판매가 부진한 일부 업체들이 출혈을 감수하고 저가 공세를 펼칠 것이고 덩달아 에어컨 가격도 전반적으로 하락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에어컨업계의 구도 개편을 점치는 시각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그 조짐은 올들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일부 중견 에어컨업체들은 올해 시장 확대에도 불구, 판매량이 감소와 유통망이 부실해지면서 적자를 면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전업체와 중견 에어컨전문업체들이 어느 정도 시장 영역을 구분해 나눠 갖던 구도가 무너지고 LG전자와 삼성전자 등 대형 가전업체가 시장을 장악하는 구도로 전개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가전업체로는 뒤늦게 진출하는 대우전자는 여기에 불을 지필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맞서 중견 에어컨업체들은 최근 가스기기업체를 비롯한 타업종과의 제휴를 한층 강화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국내 시장에서 과당 경쟁의 조짐이 나타나자 에어컨업체들은 점차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최근 해외에서도 에어컨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추세다.

북미와 유럽지역, 중동지역에서만 수요가 활발했던 에어컨 시장은 이제 동남아, 중남미, 아프리카, 독립국가연합(CIS) 등지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중국시장은 6백만대의 거대시장을 형성해 4백만대의 북미시장을 제치고 세계 최대 에어컨시장으로 떠올랐다.

이에 발맞춰 국내 에어컨 업체들은 최근 중국을 비롯한 주요 거점 지역에 해외공장을 신설하는 등 해외 시장 진출의 기반을 다지는 데 주력하고 있다.

LG전자는 올해에는 중국과 필리핀에 에어컨공장을 구축했으며 내년에는 인도와 태국에, 99년에 멕시코에 각각 에어컨 생산라인을 신설할 계획이다.

특히 올초 미국 GE사에 룸에어컨 13만대를 공급한 데 이어 미국의 대형 유통업체인 시어즈사에 앞으로 5년동안 1백50만대를 공급하는 계약을 따내는 등 수출 부문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LG전자는 이같은 물량 확보를 바탕으로 앞으로 고부가가치 시장에 자가브랜드로 진출해 오는 2000년께 세계 에어컨시장 3위권에 진입한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세계 시장을 10개 권역으로 나눠 현지 생산능력과 마케팅력을 집중시키는 생산마케팅전략(PMS)을 마련했다.

삼성전자는 중국에 에어컨 생산라인을 구축한 데 이어 내년에는 스페인에 에어컨공장을 신설할 계획이다. 두 거점을 축으로 내년부터 본격적인 세계 시장 공략에 나선다는 방침인데 최근 최근 룸에어컨을 중심으로 수출용 제품에 대한 대대적인 모델 교체와 신기술 개발에 들어갔다.

대우전자도 중국의 에어컨 공장을 축으로 앞으로 해외 시장 공략에 주력할 계획이다.

가전3사 뿐만 아니라 중견 업체들도 해외 시장 진출을 모색하고 있는데 두원냉기는 그동안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방식이 대부분이었던 룸에어컨을 독자 상표로 중남미, 중동, 유럽 등지에 진출할 계획을 갖고 있다. 만도기계도 최근 독자적인 해외 유통망을 확보하기 시작하는 등 점차 수출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올들어 에어컨업체들이 해외시장을 적극 공략한 결과 올해 국산 에어컨의 수출은 전세계 1백여개국에 걸쳐 4억7천만달러를 달성했다.

수출지역도 북미지역 25% 유럽 21% 동남아 19% 중국 15% 중남미 8% 등 권역별로 고르게 분포됐다. 에어컨이 앞으로 컬러TV, 전자레인지, 세탁기 등에 이어 주력 수출 가전제품으로 떠오르고 있다.

에어컨은 그 자체로도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이지만 연관산업에 미치는 영향도 막대한 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에어컨산업 하나만 잘해도 압축기, 모터, 동파이프, 소재 등 연관 산업도 덩달아 발전한다. 가전산업이면서도 기간 산업의 성격도 동시에 갖고 있는 게 바로 에어컨산업인 것이다.

에어컨산업은 단순히 가전업 뿐만 아니라 제조업 전반에 걸쳐 영향력이 커 국민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산업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최근 가전제품 전반에 걸쳐 특소세를 인하하는 계획을 추진하면서 에어컨만은 제외하거나 오히려 인상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물론 에어컨이 다른 가전제품에 비해 가격이 비싼 편이어서 정부의 이같은 방침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에어컨업계는 전자산업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크며 전반적으로 침체에 빠진 국내 가전산업계의 실정을 감안해 에어컨의 수요 확대에 걸림돌이 될 특소세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국내 에어컨시장이 지난 3년 동안 매년 30%가 넘는 초고속 성장을 기록했지만 최근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지원받을 정도로 국내 경기가 악화되면서 시장 전망이 한층 불투명해지고 있다.

지난 4년 연속 초고속 성장을 기록하며 가전업계와 전자업계 전반에 활력소를 부여했던 에어컨이 과연 최악의 불황속에서도 효자노릇을 할 수 있을 지 벌써부터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신화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