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역기구(WTO) 출범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으로 세계 시장이 국가간의 문턱이 없어지면서 치열한 무한경쟁시대를 맞고 있다. 시장영역이 사라진 지금 기술력 없는 기업들이 속속 무너지고 있고 국제통화기금(IMF)시대의 혹독한 시련을 앞두고 있는 국내 기업들에게는 연구개발 투자가 미래를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기술개발의 대형화, 복잡화, 첨단화 추세에 따라 기술개발 비용과 위험부담이 가중되고 있어 최근 기업의 기술개발 전략은 경쟁과 협력을 동시에 요구하여 경쟁협력(Coopetition)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 가운데에서도 우리나라 기술개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기업연구소의 수가 8일 현재 3천개를 넘어섰다. 기술한국의 초석이 그만큼 단단해졌다고 할 수 있다. 또 국내 기업들의 연구개발 투자가 87년 1조원을 넘어선 데 이어 10년만인 올해 1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는 등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 벼랑으로 곤두박질하고 있는 최근의 경제난국을 풀어나갈 수 있는 돌파구가 기업연구소라는 점에서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연구소의 역사는 20여년도 안될 정도로 짧다. 하지만 양적으로는 비약적인 성장을 지속하는 등 여러 면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다. 연구개발 활동의 대표적 산물인 특허출원 건수는 80년초 5천건에 불과하던 것이 매년 15%씩 증가하여 96년에는 9만여건에 이르고 있다. 연구원 수는 82년 초의 3천명에서 12월 현재 8만명으로 26배가 늘었다. 기술개발 투자비 역시 82년의 1천4백억원에서 올해 말에는 11조원을 상회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지난해 기업연구소의 기술개발 투자는 총 9조2천1백82억원으로 매출액 대비 2.96%에 달했다. 투자액만으로 볼 때 전년에 비해 25.5% 정도 증가한 것이다. 이는 96년의 매출액 증가율 16.2%를 훨씬 상회하는 것으로 국내 기업이 경기침체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겨냥한 기술개발 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세계 경제의 급속한 개방화를 맞아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핵심전략으로 기술개발에 투자를 집중한 결과이자 기술개발만이 기업의 유일한 생존수단이라는 기술경영 마인드가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에게까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는 증거다.
기술개발 투자액을 업종별로 보면 전기, 전자 분야가 96년 전체 기술개발 투자의 46.6%인 4조2천9백69억원(매출액대비 5.04%)을 차지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기계, 금속 분야로 전체의 32.1%인 2조9천6백억원을 투자하는 등 기술발전 속도가 빠르고 첨단기술 부문일수록 기술개발 투자가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기업연구소를 두고 있는 중소기업들의 경우 기술개발 투자가 매출액 대비 평균 3.57%에 이르는 등 대기업(2.9%)보다 앞서고 있다. 이에 따라 중소기업의 연구개발투자가 처음으로 연간 1조원을 넘어 1조4백48억원을 기록하는 등 중소기업들의 기술개발 투자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국내 기업연구소 설립은 70년대 말부터 서서히 싹트기 시작했다. 78년 9월 당시 매출액 3백억원 이상 제조업체에 대한 대통령의 기업연구소 설립 권장과 이에 따른 「민간연구소설립추진협의회」 발족을 계기로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81년 10월 과학기술처가 46개 기업연구소를 최초로 인정한 이후 83년 1백개, 88년 5백개를 각각 넘어섰으며 91년 2월 기업연구소 설립신고, 관리업무가 민간단체인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에 이관되어 실질적인 지원, 관리체계를 갖추면서 점차 기업연구소의 증가 추세도 탄력을 받고 있다. 이에 따라 기업연구소 수가 91년 4월 1천개, 95년 2월 2천개를 넘어선데 이어 2년 10개월만에 1천개가 늘어나 12월 현재 대망의 3천개 시대에 접어들었다.
3천개 기업연구소를 업종별로 보면, 최근 정보사회의 강세에 힘입어 정보처리 및 통신부문을 포함한 전기, 전자분야가 42.8%인 1천2백84개로 가장 많다. 다음으로 기계, 금속분야가 7백16개(23.9%), 화학분야 5백66개(18.9%) 순으로 2, 3위를 차지하고 있다. 소재지별로 보면 서울 1천6개(33.5%), 인천 1백76개(5.9%), 경기 8백56개(28.5%) 등 수도권 지역이 67.9%인 2천38개, 부산, 경남 3백10개(10.3%), 대구, 경북 1백99개(6.6%) 등 영남지역이 5백9개(17.0%)를 점유하고 있으며, 대전, 강원 등 중부권 지역이 3백44개(11.5%)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 광주, 호남지역은 90개(3.0%)로 상대적으로 기업연구소 설립이 미미한 실정이다.
90년대 들어 기업연구소 설립에 있어 뚜렷한 특징을 보이고 있는 점은 중소기업의 기업연구소가 급증하고 있고 아이디어와 전문지식, 창의력을 지닌 젊은 창업가들이 중심이 되어 정보처리 및 통신분야의 기업연구소 설립이 두드러지게 증가하고 있는 점이다.
3천개 기업연구소 가운데 74%에 달하는 2천2백19개가 중소기업에서 설립한 것이다. 나머지 7백81개가 대기업의 부설연구소다. 82년 단 2개에 불과하던 중소기업 연구소는 88년 4백37개로 당시 대기업 연구소 수 3백87개를 넘어섰고 93년 1천개를 돌파했다. 중소기업 부설연구소 설립이 이처럼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은 무한기술경쟁시대에 대비, 독자적인 핵심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중소기업들의 관심이 기업연구소 설립의 형태로 표출된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8만명에 달하는 기업연구소 연구원(연구전담요원)을 학위별로 보면 학사가 60.1%인 4만7천8백61명, 석사가 2만4천6백23명(30.9%), 박사가 4천2백66명(5.4%)에 이른다. 연구원의 연구개발 활동을 보조하는 관리직원은 1만여명이어서 기업연구소에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인원은 총 11만6천7백여명이다.
글로벌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국내 기업들의 해외 연구개발 투자도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 해외 현지생산 활동이나 마케팅 활동을 넘어 이제 연구개발 분야까지 세계화의 흐름을 타고 있다. 기업간 경쟁이 총력적, 전방위적 성격을 띠고 R&D의 국제화와 전략적 기술제휴가 늘어남에 따라 점차 현지 소비자의 취향에 맞는 제품을 개발하여 거대 시장에 조기 진출할 수 있도록 현지법인 형태의 연구소가 부쩍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 기업들의 해외연구소는 사무소까지 합쳐 현재 1백여개에 달한다. 이중 반도체나 컴퓨터 SW 등 첨단 정보통신분야가 20개 이상이다. 특히 이들 연구소는 대부분 실리콘밸리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 연구소 설립지역도 세계화 추세에 맞춰 미국, 일본 중심에서 벗어나 유럽, 러시아, 중국 등으로 다변화하고 있는 추세다.
기업연구소들이 그동안 거둔 성과는 눈부시다. 반도체 개발은 기업연구소가 연구개발한 성과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세계 반도체 시장을 이끌고 있는 D램은 83년 64KD램, 84년 2백56KD램, 86년 1MD램을 개발했으며 90년 삼성전자 정보통신연구소가 16MD램을 개발한 데 이어 94년 세계 최초로 2백56MD램을 선보였고 96년에는 1GD램 시제품을 개발하는 개가를 올렸다. 기계 분야에서는 91년 현대자동차 중앙연구소가 α-1.5 엔진을 개발, 국산 엔진시대를 열었으며 벤처기업인 메디슨연구소는 초음파 검사기를 개발하여 의료장비 국산화에 앞장서고 있다. 또 성미전자 연구소는 2.5Gbps급 광통신 다중화장치와 무연안선박전화장치 45Mbps급 다중화장치 등을 개발해 국내 유, 무선통신 사업자와 미국, 캐나다, 일본 등에 수출하고 있기도 하다. 핸디소프트 기술연구소는 그룹웨어인 「핸디오피스(Handy Office)」를 개발, 일본에 대규모로 수출해 주목받고 있다.
기술개발의 성과는 특허출원 건수에서도 잘 나타난다. 81년 5천여건에 불과하던 특허출원 건수가 96년 9만3백62건으로 17배 증가했다. 이 결과 우리나라 산재권 출원 건수는 96년 27만4천여건으로 세계 5위의 다출원국으로 부상했다. 그만큼 기업연구소의 역할이 커졌다고 할 수 있다.
국내 기업연구소가 이처럼 기술개발 투자, 연구인력 등 투입 요소는 크게 증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연구결과를 창출하는 질적 수준은 전반적으로 미약한 실정이다. 기술수출이 지난해 말 7백46건 5억9천2백만달러이지만 우리나라가 기술을 도입해 사용한 대가로 지불한 로열티는 지난해만도 22억9천7백만달러를 넘어서고 있다. 이처럼 기술무역수지가 악화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 기술무역의 형태가 선진국으로부터 고가의 첨단기술을 도입하고 중, 저급기술을 수출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특히 기업들의 기술협력 양상은 기술우위성이 있는 선진 외국기업과의 전략적 기술협력 또는 기술제휴를 통해 극복해 나가려는 경향이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한 산업재산권 강화 등 선진국의 기술보호주의 강화는 선, 후진국간 기술격차를 더욱 심화시켜 개도국의 기술협력을 통한 선진국의 가능성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선진화, 세계화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처한 상황 및 위치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접목할 것인가가 과제다. 특히 기업연구소 3천개시대를 맞아 최근의 국내 경제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기업연구소가 제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연구소의 양적 확대도 중요하지만 운영효율화에 노력을 집중해야 할 때다.
<정창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