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은 「벤처기업 원년」이라 불릴 정도로 벤처기업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한해였다. 산업계, 학계는 벤처기업 설립열풍에 휩싸였으며 정부, 금융계도 벤처기업 지원책 모색에 나서는 등 벤처기업 활성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본사는 지난 4월부터 이달까지 8개월 동안 「벤처기업이 뛰고 있다」는 주제로 매주 한차례 모범적인 벤처기업을 발굴, 소개하면서 미래의 벤처기업이 걸어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지난 8개월 동안 취재일선에서 벤처기업을 탐방한 기자들의 눈에 비친 벤처기업의 실상과 허상 등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 내용을 요약, 정리한다.
<편집자>
-참석자:이창호(컴퓨터산업부 차장), 서기선(경제과학부 기자), 윤휘종(가전산업부 기자), 주상돈(부품산업부 기자), 김상범(컴퓨터산업부 기자), 이일주(정보통신산업부 기자), 온기홍(산업전자부 기자)
-본지가 지난 4월 벤처기업 시리즈를 기획한 것은 벤처기업이 주요 테마로 등장한 시대흐름을 짚어보고 벤처기업이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이었습니다. 오늘 방담의 자리는 그간 취재기자들의 눈에 비친 국내 벤처산업과 벤처기업들의 실상을 정리하고 향후 전망을 알아보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우선 벤처기업의 정의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통상산업부 규정에 따르면 벤처기업은 자본의 10% 이상을 벤처캐피털로부터 제공받은 기업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정확하게 벤처기업을 정의하기가 어렵습니다. 벤처기업은 기술과 아이디어로 승부하려는 기업을 뜻해야 합니다. 일률적으로 자본금 유입을 기준으로 해서는 안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제 벤처기업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필요할 때입니다. 내년부터는 벤처기업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정부나 창업투자회사의 지원이 정확하게 벤처기업에 전달되기 위해서라도 이들에 대한 기준이 마련돼야 합니다.
-벤처기업을 정의와 함께 벤처기업이 왜 중요한가에 대한 생각들도 정리돼야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벤처기업의 중요성을 한번 더 짚어보는 것은 실제 벤처기업의 뿌리를 재확인하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정부, 창투사 지원 기준 마련 -산업화시대에 전통적인 기업을 이끌어가는 힘은 자본이었습니다. 자본의 유무에 따라 기업의 흥망이 결정됐습니다. 벤처기업은 자본보다는 기술과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합니다. 이러한 벤처기업은 기술, 제품이 급변하는 현대 정보통신사회에서 전체 산업의 근간이 되고 있습니다. 덩치가 크고 의사결정 과정이 복잡한 대기업은 첨단산업사회를 이끌어가기에 적당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예속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심하게 얘기하면 주종관계로까지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다릅니다. 부가가치 생성 측면에서도 벤처기업은 대기업에 비해 유리합니다.
-벤처산업이 활성화된 미국경제를 실질적으로 떠받치고 있는 힘은 벤처기업입니다. 우리나라는 몸집이 큰 재벌위주로 이루어지고 있어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기 힘듭니다. 현대는 벤처기술이 산업경쟁력 전반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용효과는 엄청납니다. 개미군단의 힘이 그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올해는 이처럼 중요성을 갖는 벤처기업이 주목받았던 한해였습니다. 지난해까지 벤처산업, 벤처기업들이 처한 환경과 올해 환경이 많이 달라졌을 줄로 압니다.
-우선 정부의 정책이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통산부, 정보통신부 등이 주축이 돼 소프트웨어 개발지원책 등 각종 지원책을 마련, 벤처기업 육성에 적극 나섰습니다. 벤처기업이 마음놓고 활동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 셈입니다.
-두드러지게 달라진 점은 벤처기업의 안정화시기가 빨라졌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기업형태로 보면 기술이 매출에 연결될 때만이 성장의 길을 걸었으나 벤처캐피털의 탄생으로 중소기업이 본 궤도에 올라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게 됐습니다.
-산업의 기반이 튼튼해질 수 있는 여지가 발생한 것도 벤처기업 각광으로 인한 변화입니다. 벤처기업협회, 유망정보통신중소기업협회 등의 단체가 결성돼 산업 전반을 두루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장 큰 변화는 의식의 변화입니다. 정부지원 급증, 창업 활성화, 대기업 사내 벤처제도 추진, 대학생, 교수, 연구원 창업 등도 의식의 변화에 따른 현상입니다. 이에 따라 벤처기업에 자금을 지원하는 벤처캐피털이 56개나 될 정도입니다.
-벤처기업의 활성화는 외형적인 현상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어려운 점은 없던가요. 특히 자금확보의 경우 아직까지 숙제로 남아있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기술만 갖고 있어도 자금이 지원된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벤처기업이 현실에서 겪는 어려움을 지적한다면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자금도 자금이지만 인력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쓸만한 인재들은 모두 대기업에 몰리고 있습니다. 중소기업의 인력확보를 위해 마련된 병역특례제도도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올해 산업근무요원 규정이 까다로워져 대학원을 한 학기라도 이수한 학생의 경우 중소기업이 대부분인 병역특례업체에 입사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기술개발과 연구에 뜻을 둔 대학원생들을 기업이 확보할 수 없는 것은 상당한 손실이라고 봅니다.
-벤처기업 심사기능이 확정되지 않아 자금의 분산이 어려웠다는 게 지난 벤처기업 모임에서 논의됐습니다. 창업투자회사가 56개나 되지만 제 기능을 못하고 있습니다.
-벤처캐피털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 벤처캐피털은 벤처기업을 지원하는 데 물심양면으로 노력한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경영에 관한한 벤처기업에 일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내 벤처캐피털은 일일이 간섭하려 합니다. 조기에 목표달성을 이루려는 욕심 때문이죠.
-벤처기업의 위상이 크게 강화된 것은 사실입니다만 일반인들의 의식이 그에 미치지 못한 것도 문제점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국산제품은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첨단분야는 더욱 그렇습니다. 벤처기업이 개발한 제품의 판로가 막혀있는 상태입니다.
-대기업의 무책임한 문어발식 경영 역시 벤처기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대기업은 벤처기업이 개척한 분야에서 뭔가 좀 잘된다 싶으면 가차없이 뛰어듭니다. 벤처기업의 영역과 대기업의 영역이 구분돼 있다는 냉정한 판단은 뒷전입니다.
-이같은 애로사항을 해결하는 길이 없겠습니까. 벤처기업이 위에서 언급한 각종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현실적으로 이를 단번에 일소할 수 있는 비책은 없는 상태입니다. 꾸준히 의식을 개혁해나가고 환경의 성숙을 바랄 뿐이죠. 사실 국내에서 벤처기업의 역사는 오래되지 않습니다. 이제 막 걸음마 단계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 것도 현안을 풀어나가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대기업 참여 오히려 역효과 -차분히 생각하고 해결노력을 기울이는 것밖에 처방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내 벤처산업의 허상을 가려내는 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기반을 단단히 다지지 않는다면 각종 문제의 출현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입니다. 일각에서 벤처기업 거품론이 제기되고 있는 줄로 압니다. 부작용 역시 하나 둘 나타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점검해보도록 하죠.
-벤처기업 붐이 일면서 벤처기업을 「대박」을 터뜨리는 도구로 인식하는 벤처기업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건주의, 일확천금 사상에 바탕을 둔 단견들입니다. 심한 경우 주식평가 후 회사를 넘기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는 후문입니다. 이에 따라 피해자가 발생했습니다. 인수하고 보니 빈 껍데기였다는 얘기죠. 이것은 심각한 부작용입니다.
-벤처기업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지 않고 몸집부풀리기나 포장하는 데 급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보니 최근 들어 벤처기업을 바로보자는 의견들도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같은 움직임은 다수의 성실한 벤처기업에 큰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게 일반적인 지적입니다.
-대학생 벤처기업에 대한 생각들은 어떻습니까. 대부분 거품이 아닌가 하는 의견들인데요. 반짝이는 아이디어 개발을 통해 창업정신을 키우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너무 성급하게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벤처기업은 사회적인 에너지와 막대한 기회비용이 투자되는 사업체입니다. 특히 대학생들이 학업과 병행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생각입니다. 벤처산업에 뛰어든 대학생들 가운데 몇몇은 사업적인 측면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다 안되면 말지」라는 극단적인 계산도 하고 있습니다. 대학생 벤처에 대해서는 자신의 확실한 비전이 잡힐 때까지 벤처기업 설립을 유보하는 것이 어떤가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각종 문제점 가운데 벤처캐피털로 인해 발생하는 것도 있다는 얘기가 들리고 있습니다. 예컨대 벤처기업을 주식장외시장에 상장시킨 후 재빨리 손을 터는 일도 발생한다고 합니다. 거품을 형성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지적이죠.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요.
-벤처캐피털이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방식은 크게 세가지가 있습니다. 이미 주식시장에 상장된 업체에 투자하는 것, 자생력이 확보된 중견업체에 투자하는 것과 신생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벤처캐피털은 이제 막 태어난 신생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자본가를 말하는데, 대부분의 벤처캐피털은 안정기에 접어든 업체에만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습니다. 벤처기업의 천국인 미국과 다른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벤처기업을 키우기보다는 주식장외시장 등록요견이 맞아떨어지는 기업을 찾아 그 시점에서 투자, 이익을 확보하는 게 다반사라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현 경제위기 유리하게 작용 -그에 따라 자금이 한쪽으로만 몰리는 기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것은 이에 따라 벤처기업의 프리미엄이 1천%까지 뛰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벤처캐피털이 벤처기업 확보경쟁에 휘말리는 것도 이에 따른 부작용입니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 한파로 국내경제가 초토화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IMF가 벤처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논의해볼까요.
-경기침체는 벤처기업에 득과 실을 동시에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선 실업자가 대량 양산됨에 따라 벤처기업은 기술, 아이디어를 보유한 인력을 쉽게 확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벤처기업에 인력부족이라는 가뭄을 해갈할 수 있는 단비인 셈이죠. 벤처기업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자금의 확보가 미궁에 빠지게 된다는 점입니다. 시중에 돈이 돌지 않아 벤처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계획에 차질을 빚어 주문을 받고서도 제품을 공급하지 못하는 벤처기업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벤처캐피털의 투자욕구가 뚝 떨어지는 데 따른 현상입니다. 벤처캐피털이 벤처기업에 투자해 거둘 수 있는 수익률 20%는 회사채 구입에 따라 확보되는 이익률 20%와 같습니다. 벤처캐피털이 굳이 위험이 따르는 벤처기업에 투자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입니다.
-장기적으로 판단하면 이번 경제위기는 벤처기업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입니다. 대기업의 구조조정이 불가피해지고 인력을 방출해야 함에 따라 벤처기업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이 넓어지고 우수한 인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입니다.
-IMF시대가 본격화되는 내년에는 벤처기업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인지가 최대 관심사항입니다. 산업 전부문이 구조조정기를 거치게 되면 벤처기업이 상당하게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 타당성있게 들립니다. 문제점 해결방안과 향후 전망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요.
-일부 벤처기업이 물을 흐리고 있습니다만 대세는 아닙니다. IMF시대가 본격 열리는 내년에는 경쟁력있는 벤처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주축이 돼 국내 벤처산업의 활성화가 추진될 예정입니다.
-벤처캐피털도 정상적인 투자마인드를 갖게 될 것입니다. 경쟁력을 갖춘 벤처기업만이 있을 때 벤처캐피털은 원래 의미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정부는 창업에 기반을 둔 벤처기업 지원책보다는 육성에 초점을 맞춘 지원책을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까지 국내 벤처산업, 벤처기업의 실상, 허와 실 등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벤처기업이 이번 경제위기를 잘 넘기면 내년에는 상당히 호전된 환경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정리=이일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