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특집-벤처기업] 벤처캐피털리스트의 세계

「위기 뒤에는 항상 기회가 도사리고 있다」

한국기술투자 책임심사역을 맡고 있는 박동원 부장(36)이 지난 10년동안 20여개 벤처기업에 자본투자하거나 벤처기업을 직접 설립하는 과정에서 터득한 교훈이다. 그는 이 교훈을 굳게 믿고 지금도 투자할 기업 사냥에 열심이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경제불황을 이유로 신규 투자를 대폭 삭감하는 것과 완전히 반대이다. 박부장은 실제 이달 들어서만도 1억원을 투자해 연간 매출 70억원에 달하는 초우량 벤처기업인 서울스텐다드의 주식 10%를 취득한 것을 비롯해 현재 다른 2∼3개 벤처기업들과도 막바지 투자상담을 벌이고 있다.

IMF한파가 최근 금융계를 강타하고 있고 이에 따라 대기업 계열 창업투자회사들마저 기존의 투자자금을 회수하지 못해 안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같은 공격적인 투자전략을 구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박 부장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하다. 박부장은 『위기 뒤에는 항상 기회가 도사리고 있고, 위험 부담이 크면 클수록 기대 수익율도 그것에 정비례해 높아진다』고 말했다. 이러한 자신감은 그가 국내 벤처기업 창업투자 분야에서 몇 손가락안에 드는 베테랑 벤처캐피털리스트가 아니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박동원 부장이 창업투자 업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서 였다. 지난 84년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과 동시에 금성전기(현, LG정보통신)에 입사한 박부장은 89년 한미창업투자에 합류할 때까지 약 5년동안 금성중앙연구소에서 당시 국내에서 개념조차 생소했던 무선통신 기술연구에 주력했다. 때문에 유망한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것을 생업으로 하는 벤처캐피털리스트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특별히 접해 볼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다. 그는 연구소 생활에 차츰 지루함을 느끼던 차에 한미창업투자가 89년 설립과 함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엔지니어 출신 심사역을 뽑는다는 말을 듣고 바로 응시한 것이 벤처캐피털리스트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는 것이다. 그 후 그의 벤처캐피털리스트 생활은 90년 통신 네트워크 전문업체인 씨엔아이를 발굴, 약 4억5천만원을 투자해 지난해말 성공적으로 코스닥 시장에 등록시킴으로써 10배 이상 수익을 올린 것을 비롯해 피코소프트, 신광전기, 키스크 등 20여개에 달하는 벤처기업에 투자, 그동안 모두 회사채 수익율 이상 이익을 내는 등 뛰어난 수익율을 기록하며 탄탄대로를 달려왔다는 것이 주위 동료들의 한결같은 평가다.

벤처캐피털리스트라는 직업은 박 부장의 경우처럼 「위험 뒤에 숨어있는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아내 이를 수익으로 연결하는 사람들」로 정의 할 수 있다.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은 또 각종 투자를 하면서 터득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직접 자신의 기업을 설립, 독립하는 경향도 있다.

국내 최대 신기술 금융회사인 한국종합기술금융(KTB)에서만 최근 2년동안 베테랑 심사역 2명이 회사를 그만두고 직접 벤처기업 창업을 결행, 독특한 사업 아이템과 높은 기술력으로 벌써부터 국내, 외 정보통신업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화제의 인물은 언어기술의 방기수 사장과 미디어 링크의 하정률 사장. 언어기술의 방기수 사장은 서강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84년에 KTB에 입사한 이래 10여년간 투자심사역을 맡아온 전문 벤처캐피털리스트. 지난 91년부터 약 5년동안 대전지점장으로 일하면서 핸디소프트, 덕인, 한국인식기술 등의 벤처기업을 발굴, 잇따라 성공시키는 등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다. 방사장이 6여년의 준비과정을 통해 지난해 4월 창업한 언어기술은 회사이름 만큼이나 사업 아이템도 생소하다. 이 회사는 언어처리 분야에 주력하며 특히 한국어의 언어처리 관련 소프트웨어 등을 개발하고 있다. 언어기술은 한국어 전산처리 분야 독보적인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최기선 박사와 시스템공학연구소 등과 상호 협력하고 있으며 창업 첫해 1억7천만원의 매출에 이어 올해 10억원을 기대하고 있다.

미디어링크의 하정율 사장은 KAIST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후 곧장 KTB에 입사해 엔지니어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투자심사역을 맡게 된 벤처캐피털리스트. 하사장은 10년간 KTB에 근무하면서 터보테크, 스텐다드텔레콤 등 35개 국내 유망 벤처기업과 15개 외국기업을 발굴하는 실적을 올리기도 했다. 입사 초기부터 창업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던 하사장은 올 2월 회사측의 파격적인 우대조건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디어링크를 설립 창업했다. 설립 자본금 5억원은 하 사장이 우리 사주를 처분하고 퇴직금 등을 합쳐 3억원을 투자했고 나머지 2억원도 직원들이 조금씩 투자해 조달했다. 미디어링크는 네트워크 서비스와 시스템 전문업체로 관련 업계에서는 인적 구성과 기술력이 국내 최고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 국내 베테랑 벤처캐피털리스트간에는 벌써부터 이 회사에 조금이라도 지분을 더 확보하기 위해 물밑 경쟁이 치열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국내 58개 창업투자회사에서 벤처캐피털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은 3백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중 20건 이상 투자경험을 가진 베테랑 벤처캐피털리스는 전체의 10%에 해당하는 30명 정도에 불과하다. 따라서 58개에 달하는 국내 창업투자회사들간 경쟁은 「연금술이 뛰어난」 베테랑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을 얼마나 많이 확보하고 있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