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균동 감독의 영화는 마치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읽는 듯한 독특한 개인적 코드가 팔딱거리며 살아 숨쉰다. 그리고 때로 오만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이런 점이 그를 영화적 완성도와 별개로 신세대 감독군의 선두대열에 올려놓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죽이는 이야기」는 삼류감독의 영화 만들기를 그린 블랙 코미디로 여균동 감독의 작품 이력 가운데서는 가장 보편적 재미가 있다. 여전히 오만함이 느껴지지만 그로서는 관객의 시선과 타협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감독은 섹스와 여관, 훔쳐보기라는 가장 상품적 가치를 지닌 영화 소재를 「영화 만들기」라는 이야기 구조 속에 풀어헤친다.
「죽이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삼류감독 구이도(문성근 분). 그는 얼굴도 모르는 여자 손님과 사랑에 빠지는 여관 종업원의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에 관한 기획안을 들고 제작자를 찾아간다. 여관과 섹스라는 소재에 제작자는 구이도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한다. 조건은 자신의 정부인 말희(황신혜 분)를 주인공으로 해야 한다는 것. 에로배우의 딱지를 떼고 멋진 변신을 꿈꾸는 말희와 「폼나는」 액션영화를 찍고 싶어하는 하비(이경영 분)까지 가세, 영화작업은 점점 난관에 봉착한다. 구이도의 작업을 돕겠다며 여관 종업원은 여관방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 손님들의 정사장면을 비디오로 찍어오고, 배우가 되고 싶은 춘자(전이다 분)는 자신의 정사장면이 찍힌 것도 모른 채 말희의 대역으로 캐스팅 된다.
각자 자신의 욕심대로 영화를 만들고 싶은 이들의 만남은 갈등을 빚고, 결국 구이도는 끝까지 자신의 영화를 만들지 못한다. 음란한 세상에서 순수한 사랑을 그리려했던 구이도는 음란물 배포죄로 체포당하고, 이제 영화는 그의 손을 떠나 말희와 하비가 의도한 「멋진 영화」로 둔갑된다. 말희와 하비가 영화를 찍으면서 호텔 로비로 내려오는 마지막 장면은 마치 관객을 향해 「당신들도 이런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거림처럼 들린다.
「죽도록」 같은 얼굴을 봐야 하는 한국영화 관객들에게 이 영화의 가장 「신선한 위안」이라면 여관 종업원으로 분한 록그룹 삐삐 롱 스타킹 출신의 고구마와 춘자 역의 전이다. 그들은 이제는 질릴만도 한 주연배우들에게 지쳐가는 관객의 시선을 붙잡는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삼류인생에서 자신들의 잣대로 영화를 만들어간다.
그러나 이게 현실이라면 한국영화의 앞날은 얼마나 우울한가. 이것이 과연 관객들이 보고 싶어하는 영화이며 영화감독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구차한 변명이 될 수 있는가 의심스럽다.
<엄용주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