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년 새해는 국제통화기금(IMF)체제라는 국가경제 비상시기에서 시작해야 하는 만큼 국내 기업에는 혹독한 시련의 한 해가 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크고 작은 기업들이 새해 들어 신년 사업계획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올 한 해 경영이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같은 상황은 국가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전자, 정보통신업계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이같은 위기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해 빈사상태에 있는 국내 경제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기대가 전자, 정보통신업계의 경영자에게는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국내 주요 전자, 정보통신업체의 최고경영자를 만나 IMF파고를 헤치고 세계 일류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새해 포부와 각오를 들어본다.
대담=가전산업부 양경진 부장
「경영의 투명성」과 「노경(勞經)간의 신뢰감」. 이는 LG그룹의 전자미디어CU를 이끄는 구자홍 LG전자 사장이 IMF라는 비상경영체제를 타개해가는 데 내세운 필요전제조건이다. 『국가경제가 총체적 난국을 맞은 상황에서 조직 구성원 모두 최고경영자가 위기를 무난히 타개해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만큼 그 어느때보다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토로한 구 사장은 『경영층의 투명한 자구노력과 이에 대한 종업원의 신뢰감이 뒷받침될 때 현재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IMF체제에서 맞는 무인년 새해 소감을 밝혔다.
신뢰감 쌓일때 위기 극복 -LG전자는 지난해 극심한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매출 및 순익 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습니다. 지난 한 해의 결과를 어떻게 보십니까.
▲LG전자는 지난해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큰 성장을 거둔 한 해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21세기를 향한 「챔피언정신」이라는 기업이념이 단순히 구호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연구개발(R&D)에서부터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서 구현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IMF체제에 들어가기 2∼3년 전부터 선택과 집중이라는 경영철학에 바탕을 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업구조조정을 통해 조직체질을 강화하고 수익성 지향의 내실경영을 추구해온 결실이기도 합니다. 특히 가치창조적인 노경관계에서 자연스럽게 생산성 향상을 창출해 LG전자가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됐습니다. 제품별로는 CD롬 드라이브, CPT 등 전략제품부문 매출 및 수익성이 높아졌으며 다른 제품에 비해 수익성이 높았던 모니터나 에어컨, 세탁기 등의 매출확대 또한 극심한 경기부진 속에서도 지난해 초에 세운 9조원이라는 목표에 근접하는 성과를 거두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IMF한파로 인해 국내 기업들의 경영환경은 올해 더욱 악화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분석입니다. 올해 국내 전자산업에 대한 전망과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사실 한 치 앞의 변화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입니다. 그동안 한국기업은 고속성장을 거듭해 왔지만 현재와 같은 비상체제 하에서는 과거의 경영이나 재무구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패러다임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현금 유동성을 확보함으로써 건실한 재무구조를 가져가는 것이 필수적이며 사업구조조정 또한 외형확대에서 수익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환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전반적인 시장상황도 어려워질 것으로 에상됩니다. 내수의 경우 대기업의 부도사태와 구조조정에 따른 투자 및 소비심리 위축으로 AV기기나 컴퓨터 등을 중심으로 부진을 면치 못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따라서 국내 전자업계로서도 내수시장에서 불필요한 과당경쟁을 지양하고 수출확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봅니다. 환율인상으로 국산제품의 가격경쟁력이 확보된 데다 개도국 및 신흥시장의 성장으로 수출확대는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선진국의 무역규제 강화 및 후발 개도국과의 경쟁, 해외진출기업의 현지조달 확대 등 제약요인이 많기 때문에 이를 어떻게 극복해 수출을 확대해 가느냐가 관건입니다.
-이같은 상황을 타개할 방안은 있는지요.
▲올해 경영환경은 그 어느때보다도 불확실성이 클 것입니다. 저는 발생가능한 위기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지난 연말 비상경영체제를 선언한 바 있습니다. 급변하는 환경에 즉각 대응하자는 취지입니다. 그렇지만 LG전자는 창립 이후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면서 다져진 노사간 신뢰감이 확고히 조성돼 있어 이같은 위기를 충분히 극복할 것으로 자신하고 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재무구조의 건전성, 사업구조조정의 가속화, 철저한 의식개혁 등 3개 과제를 올해 경영방침으로 정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현금 유동성 확보를 경영활동 기준으로 삼아 재무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한편 철저한 내핍경영과 성과 중심주의를 지향해갈 것입니다. 사업구조조정은 생존의 문제인 만큼 선택과 집중전략을 강력히 추진하고 긍정적인 사고 및 과거의 구습을 탈피하기 위한 의식혁명을 전사적으로 전개할 계획입니다. 물론 이같은 자구노력은 경영층의 솔선수범하는 자세와 구성원들이 공감할 수 있는 투명성이 전제돼야 할 것입니다. 이같은 자구노력에 대해 조직원들이 이해하고 또 가치창조에 대한 성과가 나왔을 경우에는 반드시 보답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시행하겠습니다.
-전자업계의 사업구조조정이 최대의 이슈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LG전자의 사업구조조정 방향과 이와 관련된 첨단사업 및 기존 주력사업인 가전사업에 대한 향후 사업방향에 대해 설명해 주시지요.
▲안정적인 수익성과 건실한 재무구조를 확보하기 위해 사업구조조정은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수익성과 장래성이 없는 한계사업 및 부진사업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철수하고 이에 따른 잉여자원을 승부사업에 집중할 것입니다. 투자 또한 철저한 사업 타당성 검토를 통해 사업가치 및 현금창출 능력을 증대하는 데 우선순위를 둘 것입니다.
견실한 재무구조에 역점 이같은 원칙은 가전부문이나 첨단부문 모두 해당됩니다. 다만 가전사업의 경우 내수시장에서는 보급률이 높기 때문에 수출드라이브 정책으로 사업을 확대하겠지만 LCD 등 차세대 디스플레이 소자부문은 대규모 투자가 선행되는 만큼 오히려 기업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재검토가 불가피할 것입니다. 그러나 DVD나 디지털TV 등 첨단제품군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원칙을 적용해 전략적으로 육성할 제품군을 과거보다 줄여 이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전략적으로 육성할 사업에 대해서는 정보통신부문이 전자미디어CU에 새로 편입된 만큼 전반적인 상황을 고려해 결정할 계획입니다. 첨단부문의 연구개발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사업전략과 기술전략을 동시에 충족시켜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추진하겠습니다.
-LG전자의 성장 이면에는 기술력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입니다. 특히 LG전자는 외국 선진업체들과의 제휴 및 합작을 통해 가장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것이 주위의 평가입니다. 첨단기술 확보를 위한 전략은 무엇입니까.
▲LG전자의 목표는 차세대 승부사업부문에서 세계적인 메이커로 도약하는 것입니다. 첨단부문에서는 원천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바로 생존의 관건이지만 국내업계의 현실로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LG전자가 세계 선진기업들과 전략적인 제휴를 적극 추진하는 것은 원천기술을 보유함으로써 세계 기술표준의 주도권 경쟁에 동참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있는 선진기업 대부분이 한편으로는 가장 큰 고객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업을 확대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IBM, 마이크로소프트 등 세계적인 기업과의 제휴가 성공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배경에는 파트너로서 LG전자에 대한 강한 신뢰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앞으로도 새로운 사업기회를 발굴하고 실질적인 원천기술을 보유하기 위해 원천기술 보유업체와의 전략적인 제휴관계를 구축하고 벤처기업 투자를 통한 파트너십을 확대하는 데 주력할 계획입니다.
-IMF 경제체제 하에서 전자업계의 관심이 수출확대 등 해외쪽으로 모아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해외투자가 갈수록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 적자를 내는 해외사업장에 대한 정리도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해외사업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가 필요할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해외시장 권역별 차별화 ▲그렇습니다. 지적하신 대로 LG전자도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인 만큼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LG전자는 우선 해외시장을 주요 권역별로 선진시장과 성장시장, 승부시장으로 구분해 시장별로 차별화한 마케팅으로 해외시장 공략에 총력을 결집할 계획입니다. 시장으로서의 매력과 시장지배 기회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중국과 CIS, 인도 등은 승부시장, 시장이 커 매력은 있지만 시장지배 기회는 상대적으로 적은 북미나 일본, 유럽은 선진시장, 시장으로서의 매력은 뒤지지만 시장지배 기회가 상대적으로 높은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중남미 등은 성장시장으로 설정했습니다. 승부시장에서는 주력제품을 앞세워 40% 이상 매출을 늘려나갈 계획이며 성장시장에서는 선택과 집중으로 수익성을 확대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선진시장에서는 정보통신 제품을 중심으로 수출확대를 추진하고 이와는 별도로 신기술 확보나 신사업 기회를 모색해 나가겠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해외법인도 성과중심으로 운영해 수익창출에 기여하지 못하면 과감히 철수시킬 계획입니다.
-올해 미국을 중심으로 디지털TV시장이 형성됨에 따라 디지털TV의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있는 제니스의 역할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제니스에 대한 앞으로의 기대와 경영을 정상화하기 위한 노력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미국에서 디지털TV방송이 시작됨에 따라 디지털TV시대가 올해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개막될 것입니다. 제니스가 보유하고 있는 디지털TV 관련 원천기술과 LG전자의 강점인 응용기술이 합쳐질 경우 세계 디지털TV시장을 선도해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초기시장인 만큼 제니스가 이를 사업성과로 연결하는 데는 당분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제니스의 경영이 정상화될 때까지 본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선택과 집중차원의 강도높은 사업구조조정을 계속해나갈 것입니다. 다만 당초 인수목적대로 제니스의 기술력을 극대화하고 또 LG전자가 미국시장에 진출할 기회를 확대할 수 있도록 제니스 브랜드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투자는 앞으로도 더욱 확대해나갈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리=양승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