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내가 단골로 가던 술집에 오래간 만에 들렀다. 소위 IMF를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게는 썰렁했다. 그 날 손님은 우리뿐이었는데 주인이 반갑게 맞이하더니 방금 다녀간 경찰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정기적으로 돈을 뜯어가는 그 지역 파출소는 IMF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면서 도대체 경찰이 마피아식으로 군림하는 이 사회는 어떤 곳이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가게 주인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보는 순간, 지난 78년 미국 유학시절이 생각났다. 초보운전에다 영어까지 서투른 나는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나서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유학생 선배들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미국인 경찰이 왔고 『좀 잘 봐달라』는 내 얘기를 뒤로 한 채 허리에 차고 있던 몽둥이를 내게 주었다. 그리고는 내 차 밑으로 들어가 타이어를 교체해줬다. 고맙다는 나의 말에 그는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휭하니 가버렸다.
파출소의 경찰은 이 사회의 지도층 치고는 말단이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 각각 5천억원 이상의 돈을 착복했으며 얼마 전 IMF위기 속에서 사면됐다. 최규하 전 대통령은 광주사태 증언요구에 대해 「대통령이니까」라는 이유로 끝내 증언을 거부했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지난 17일 폴라 존스와 함께 6시간 동안을 성희롱 사건에 관해 직접 증언했다. 아칸소주의 한 작은 소녀가 미합중국 대통령과 동등하게 설 수 있도록 사법제도가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에 존스는 미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박정희시대 이래로 수출만이 살 길이라는 말로 국민은 허리띠를 졸라맸다. 삼성, 현대, LG, 대우, 선경 등 5대 재벌을 선진국 대항 대표선수로 키워놨더니 그들은 빚만 잔뜩 남겨놓았다. 정경유착과 부실금융의 전과자인 현 정부 지도자들은 각 부처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며 신 정부의 조직 슬림화 작업에서 오로지 생존만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보도다.
지난 21일 과기처의 과학기술정책연구소에서 주관한 「특정연구과제에 대한 기술평가제도 개선을 위한 공청회」에서는 『앞으로는 과학자들이 보다 마음 편히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든지 『연구결과에 대한 평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등의 견해가 발표되었다.
이는 오늘의 낙후된 기업 기술력의 책임 한 가운데 있는 과학자들이 과거 반성 없던 연구에 대한 참회보다는 민초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기술분야라는 약점을 이용하여 이 나라 경제회복을 위한 선진국과의 기술경쟁을 기피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일부 젊은 과학자들이 의기를 투합해 「先연구 後보상」으로 기업의 애로기술 해결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하는 데 비하면 이들은 정말 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같다.
IMF 자금은 이미 우리가 꿔 쓴 돈을 갚는 데 쓰일 것이고 그 이자만 한 해에 2백억달러를 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무역수지가 매년 2백억달러 이상 돼야 또다른 자금을 빌려오지 않아도 된다. 물론 IMF에서 빌린 원금은 그대로 남는 상태로 말이다. 한 번도 이렇게 많은 흑자를 내본 적이 없는 우리나라로서는 겁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극복하려면 자기 직분을 다하려는 마음의 자세가 무엇보다도 요구된다. 지도층은 특히 과거 무엇을 잘못했는지 철저히 반성하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야 한다.
경제가 어려운 것은 열심히 일하면 극복할 수 있지만 부실금융이라든가 정경유착 등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를 「IMF라야 해결한다」는 작금의 사태 등은 지도층의 각고의 반성으로만이 극복될 수 있다. 「우리는 안돼」라는 민초들의 정신적 공황은 지도층의 노력 없이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지도층의 명백한 반성이 없다면 이제 민초들로서도 가지고 있던 금붙이나 달러를 꺼내놓지 않을 것이며 꺼내서도 안된다.
<주승기 대학산업기술지원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