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청년 성기수-아버지의 유언 (2)
49년 성주농업학교 4학년에 편입학하면서 성기수의 학구열은 되살아났다. 수학(數學)과목에 대한 남다른 자신감과 열정, 우등생에 대한 자부심 등 대구사대부중시절의 그것들과 아무 것도 다를 바 없었다. 이 시절 서로 경쟁하면서 학업에 대한 열정을 이끌어 주며 청운의 푸른 꿈을 얘기했던 이가 한인규(韓仁圭, 전 서울大 농대학장)였다. 전교 1, 2등을 다투던 성기수와 한인규는 동네에서 한 시간 거리의 성주농고를 함께 통학하면서 영어 단어를 외웠고 밤에는 졸음을 쫓기 위해 권투를 하다 가끔씩은 싸움인지 장난인지 모르게 끝내곤 하던 막역한 사이였다.
성기수와 한인규에 대한 얘기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 91년 2월 23일 초전국교 졸업식이 계기가 됐다. 한 사람은 전학으로, 또 한 사람은 월반(越班)으로 전학년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던 이들에게 학교 측의 배려로 45년만에 명예 졸업장이 주어진 것이다. 이날 두 사람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보다 더 기쁘다』며 감격스러워 했다.
성기수와 한인규는 고향인 성주군(星州郡) 초전면(草田面) 대장동(大獐洞) 마을에서 함께 자랐으며 초전국교 5학년까지도 같은 반이었다. 둘이 헤어지게 된 것은 성기수가 초전국교 5학년 때 왜관국교로 전학을 가고 그 곳에서 곧바로 대구사대부중에 입학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한인규는 초전국교 5년을 마치고 검정고시를 거쳐 성주농고에 입학해 있었다. 성주농고에서 한인규와 동급생으로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대구사대부중 2학년 때 제적당했던 성기수가 결과적으로 1년을 월반한 셈으로 4학년에 편입학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두 사람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얼마나 공부를 잘한 수재였던가를 알려주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30호 남짓한 대장동과 인근 마을에서는 두고두고 서울대학교를 진학한 성기수와 한인규 두 사람의 성공담이 회자되고 있었다. 회자된 성공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전 정보통신부장관 이석채(李錫采)다. 45년생으로서 성기수보다 11살이나 아래인 이석채 역시 초전국교를 다녔으며 대장동과 인접한 월곡동(月谷洞) 마을에서 자랐다.
장관 재직시절 어느 날 이석채는 한 모임에서 고향선배 성기수를 만나 대뜸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 선배님 때문에 스트레스 참 많이 받았습니다. 저희 부모님이 날이면 날마다 그러시는 거예요. 대장동의 성기수만큼만 (공부)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그 덕에 저도 서울대에 들어가긴 했습니다만….』
성기수가 성주농고 5학년 때 학업을 중단한 것은 부역자(附逆者)로 몰린 아버지의 희생과 재산몰수 등으로 풍비박산이 난 가정형편과 자신에게 붙여진 보도연맹(輔導聯盟) 회원이라는 딱지 때문이었다는 것은 지난 호에서 설명한 대로다. 이에 앞서 50년 봄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성기수는 서울대 경제학과에 재학 중이던 작은형의 권유로 또 한 번의 월반을 시도하기로 했다. 가을에 있을 검정고시 준비로 한창이던 때에 전쟁이 터졌다. 작은형이 의용군에 끌려갔다는 소식과 함께 남쪽으로 후퇴하는 국군과 경찰이 보도연맹회원들을 무차별 처형한다는 얘기가 바람에 바람을 타고 전해 내려왔다. 대구사대부중 동기며 축구부원으로서 시위의 선봉에 섰던 친구 백서흠이 인천소년형무소 복역 중 총살됐다는 끔찍한 소식도 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성주읍내에서도 보도연맹 회원이던 자신의 소재를 묻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성기수는 그날로 곧장 마을 뒷산으로 피신하는 도망자 신세가 됐다.
7월 말 성주군에도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동네에서 불과 10여㎞ 밖에 있는 낙동강 왜관철교(倭鐵橋)를 사이에 두고 국군과 인민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면서 성기수는 산에서 내려왔다. 초전국교 때 한반 친구 박찬수와 양조장을 경영하던 그의 아버지, 교장선생님 등이 지주계급으로 몰려 이미 처형당한 뒤였다. 지주계급이던 성기수의 집안은 무사했지만 그 대신 아버지는 대장동 인민위원회 위원장직을 거절할 수 없어 마을사람들로부터 군량미를 거두어 밤마다 낙동강 전선으로 실어 나르는 일에 나서고 있었다.
50년 9월, 전세는 역전돼 낙동강 전선으로부터 인민군의 퇴각이 시작됐다. 보도연맹 회원이었던 성기수는 인민군의 후미를 따라 함께 북상하기로 결심했다. 평양을 거쳐 소련으로 가서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하겠다는 계산이었다. 대구사대부중 재학시절만 해도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을 동경하며 모스크바대학 유학을 꿈꾸던 학생들이 적지 않았었다.
아버지와 큰형은 성기수의 결심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동조하지도 않았다.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도망갈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국도를 따라 김천(金泉)을 거쳐 밤낮으로 사흘을 걸었다. 한밤중에 대전(大田) 시내로 접어드는데 갑자기 총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국군의 기습이었다. 인민군과 그 뒤를 따르던 민간인들이 혼비백산해 흩어졌다. 산속으로 숨어들어 하룻밤을 세우면서 성기수는 모스크바 행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국도로 내려왔다. 산에서보다는 길에서 잡히는 것이 훨씬 안전할 것 같았다. 예상대로 국군에게 잡혔으나 단순 난민으로 판정됐던지 포로수용소행 트럭에 실리는 일은 면했다. 귀가하던 중 김천경찰서에 또 한 번 연행이 됐으나 이번에도 인민군의 물자운반에 강제동원됐다가 탈출중이라는 변명이 먹혀들었다.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겨우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와 큰형은 경찰서로 끌려가 부역자로서 죄상을 추궁받고 있었고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와 젊은 형수는 반 실신 상태가 돼 있었다. 마을에서는 인민군 치하에서의 우익인사 학살사건 동조자 색출작업이 한창이었다. 적극 가담자들은 이미 모두 떠나버린 상황에서 마을사람들의 갖가지 불리한 증언들이 아버지와 형에게 쏟아졌다. 아버지는 경찰서에서 20여일 동안 고초를 겪고난 다음 석방됐다. 그러나 아버지는 집에서 하루를 보낸 다음날 다시 연행됐다. 그날 밤 초전면에 인접한 선남면(船南面)의 낙동강 백사장변으로부터 요란한 총성이 들려왔다. 남몰래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해서 선산에 모신 것은 그로부터 몇 달 뒤인 그 해 겨울이었다.
한편 성기수는 며칠간 집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초전면 지서에 나가 흠씬 얻어맞은 뒤 김천경찰서에서와 비슷한 자술서를 쓰고 집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보도연맹 회원이라는 신분이 탄로나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었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어느 날인가 일단의 군인들이 집에 들이닥쳤다. 그들에 의해 학교 운동장으로 끌려 나왔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성기수는 대구사대부중 친구 백서흠과 양조장집 아들 박찬수를 생각해냈다. 낯익은 얼굴들, 성주농고 같은 반 급우들의 주먹질과 군인들의 군화발이 수도 없이 몸에 와 닿았다. 모든 것을 체념하자, 눈부시게 푸른 가을 운동장의 하늘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서늘한 밤 공기에 눈을 떠보니 집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날의 사건은 좌익학생들이 떠벌리던 대구에서의 무용담 속에 성기수의 이름이 오르내리던 것을 인민군 치하에서 그들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우익학생들이 기억해냄으로써 일어난 일이었다. 성기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전선(戰線)이 이미 38선을 넘어서고 있었고 후방에서도 그만큼 좌익의 준동(蠢動)가능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경상도 지역으로부터 거친 전운(戰雲)이 물러간 51년부터 53년 말까지 3년간 성기수는 대장동에서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농사일을 거들었다. 51년 초 성주농고 복학을 포기한 채 대구에서 미8군 사령부의 하우스보이와 국수공장 종업원 등으로 외지 정착을 시도했다. 그러나 위염과 십이지장충 감염 때문에 3개월 만에 집에 돌아오고 말았다. 물론 병명은 나중에 안 것이었다. 병명도 모르는데다 가난 때문에 도회지의 큰 병원을 찾을 형편이 못됐던 성기수의 투병생활은 1년간이나 계속됐다.
건강이 회복되자 열 아홉 살의 성기수는 피폐(疲弊)와 가난으로 도탄에 빠진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성주농고에서 배운 신농법(新農法)은 많은 도움이 됐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를 악물고 시작했던 양계(養鷄), 신품종 수박농사, 양돈(養豚) 등이 결실을 보는 단계에서 항상 사고가 나 물거품이 되곤 했다. 실패와 경험이 쌓일수록 다음 번에는 반드시 성공한다는 자신감과 의욕이 커져갔다.
하지만 20세가 가까워지고 있는 성기수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비명에 간 아버지의 유언(遺言), 가문(家門)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어머니의 간절한 소원, 그리고 과학도를 꿈꾸어온 자신의 꿈, 이 모든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학에 진학해야만 했다. 만약 대학에 가지 못하면 만 20세가 되는 54년에는 군에 입대해야만 했다. 이대로 입대한다면 4년 후면 24살, 국졸 학력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시골 제대군인이 돼 있을 터였다. 또 그렇게 되면 평생 농촌에 눌러 지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든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여러 궁리 끝에 성기수는 김천고등학교에 가서 4년째 행방불명인 작은형의 졸업증명서를 만들었다. 입학지원 원서는 형의 이름으로 작성됐고 사진은 자신의 것을 붙였다. 53년 초 치른 시험에서 성기수는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에 합격했다. 그러나 입학은 포기했다. 입학금도 마련할 수 없었을 뿐더러 형의 이름으로 대학을 다닌다는 것이 자신의 미래를 놓고 볼 때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검정고시부터 준비해야 될 것 같았다. 낮에는 농사일을 돕고 밤에는 진학공부를 거듭하는 주경야독의 시간이 다시 시작됐다. 환도(還都) 후 53년 12월 서울에서 치른 대입검정고시는 합격이었다. 한 달 동안 국립도서관에서 총력을 기울였던 대학입시도 합격이었다. 당당히 국립 서울대학교 학생이 되려는 순간이었다. 서울로 떠나던 날 밤 성기수는 비로소 아버지의 유언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성주경찰서에서 고초를 당한 뒤 석방되던 날 밤 아버지는 당신의 죽음을 직감한 듯 성기수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집을 떠나거라, 그리고 성공할 때까지는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오지 마라.』
아버지의 유언은 새로운 희망으로 되살아났다.
<서현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