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청년 성기수-전과(轉科) (3)
성기수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입학한 것은 54년이었다. 누님들과 일가친척의 도움으로 등록금이 마련됐다. 높은 이상과 자존심을 갖고 대한민국 최고의 학문의 전당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 가 본 서울 공릉동(孔陵洞)의 공대 캠퍼스에는 아직도 전쟁의 상흔이 완연했다. 건물 곳곳에는 포탄과 기관총 흔적이 상처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전쟁의 잔해들이 여기저기 드러누워 있었다. 『과연 이곳에서 학업이 이뤄질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작은누님이 살던 이화동(梨花洞)과 공릉동 사이의 등하교 길은 힘들었다. 청량리(淸凉里)에서 갈아타는 버스를 한 번 놓치면 30∼40분씩 기다려야 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하교 길은 차비가 없어 걸어온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학교 내부사정은 훨씬 심각했다. 도서관의 책들이 다수 분실돼 있었고 교수진은 절대 부족이었다. 그나마 갖춰진 교수진 가운데서도 4년제 대학을 제대로 졸업한 이가 거의 없었다. 이 때문인지 강의체계가 엉망이었다. 강의의 진도나 과제량도 아주 미미해서 기말시험 며칠 전부터 강의노트를 달달 외운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A학점을 받을 수 있었다.
졸업 후의 취직문제는 더욱 한심한 것이었다. 아무리 좋은 학점을 얻어 보았자 졸업 후 제대로 된 직장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경제력이 미미하던 건국 초기라 공대 졸업생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재학생들 사이에서는 전후(戰後) 실존주의(實存主義)와 허무주의(虛無主義) 철학까지 팽배해 공릉동 캠퍼스 일대는 다방, 당구장, 주점, 극장 등이 크게 성행했다.
어렵게 어렵게 입학한 대학에서 성기수가 찾고 기대하는 것은 너무도 많고 컸다. 비록 조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불쌍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그래서 미국에서 헌 옷가지와 먹을 것을 보내오고 있지만 한 번 일어서려는 노력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 조국은 각 분야의 전문가와 기술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었다.
화공과 1학년 생활은 부족한 학교시설과 교수진 그리고 학비, 성기수는 이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하던 시절이었다. 학업에 대한 정열은 헌 책방을 뒤져 구하곤 했던 원서(原書) 탐독으로, 학비는 시간과외와 입주과외로 해결했다. 학교 강의보다는 원서 탐독이, 원서 탐독보다는 학비 버는 일이 더 급하고 소중했던 날들이었다. 고향에서는 어머니와 전쟁중에 남편을 잃은 큰누님이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학비 버는 일로 시간이 없어 한 번 내려가지를 못했다. 사상의 회오리 속에서 살아남은 큰형은 부산 미군부대의 노무자로 일했다. 한 학기 동안을 얹혀 살았던 작은누님 댁은 6남매 가운데 그래도 가장 안정된 직장(한국은행)을 가진 남편을 두고 있었지만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인생은 무엇인가. 지구와 우주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인류의 역사와 종교의 본질은 또 무엇인가…. 입학시절 끝없는 토론의 상대가 돼준 이는 법과(法科) 동기생 이시윤(李時潤)과 조선항공공학과(造船航空工學科) 2년생 박철(朴哲)이었다.
문민정부 때 제16대 감사원장을 지낸 이시윤은 이화동 작은누님 댁의 이웃사촌으로 서울대 입학시험을 준비하던 때부터 사귀었다. 이시윤과는 대학생이 된 이후에도 캠퍼스는 달랐지만 자주 만나 산행과 토론 등을 통해 인생을 이야기하던 사이였다. 지금은 항공역학(航空力學)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이 된 박철(전 NASA연구원, 현 일본 도호쿠大 교수)은 대구사대부중 동기였던 성재경(成在慶, 현 大韓油槽船 사장)의 기숙사 룸메이트로 만났다.
학창시절의 교우 가운데 박철과의 만남은 성기수에게는 일생일대의 사건이 됐다.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성기수와 박철은 대학 4년에 이어 대학원과 공군(空軍)에서 생활을 함께 했다. 아버지가 고공(高工, 지금의 공과대학), 어머니가 사범학교 출신인 박철의 가정환경은 성기수의 그것과 큰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음악, 문학, 철학, 영어 등 다방면에 소양이 있었던 박철의 사고영역과 활동공간은 성기수의 그것들과 어느모로 보나 비슷했다. 성기수가 2학년 진급과 동시에 화공과에서 조선항공공학과로 전과(轉科)한 것은 실험용 화공약품 냄새가 싫었던 탓도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박철의 권유 때문이었다.
성기수가 화공과를 지원했던 것은 애당초 이 분야에 뜻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전쟁 직후라 모든 물자가 극히 귀했던 시절이었다. 비누, 치약과 같은 생필품과, 비료, 농약 등의 생산과 직접 관련이 있어 보이는 학과가 바로 화공과였다. 이른바 인기학과였던 것이다. 합격자가 발표된 날 보니 화공과는 서울대 전체에서 커트라인이 가장 높은 학과가 돼 있었다.
조선항공공학과(나중에 조선공학과와 항공공학과로 분과)로의 전과는 결과적으로 성기수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분기점이 된 셈이었다. 조선항공공학과는 모든 면에서 성기수의 취향과 맞아떨어졌다.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게 키워오던 과학자에 대한 꿈이 바로 이 분야인 듯 싶었다. 무엇보다도 둘도 없는 선배겸 친구 박철이 있었고, 특히 자신 있었던 수학(數學)에 대한 공부를 더 많이 할 수 있었다. 박경찬(朴慶贊, 전 大韓數學會 회장) 교수를 만나면서부터는 주거(住居)와 학비를 해결하기 위해 이 집 저 집을 전전해야 했던 입주과외도 청산할 수 있었다.
55년 봄학기 들어 서울 공대는 실력파 수학자였던 박경찬 교수의 집합론(集合論) 특강을 개설됐다. 이 강의는 서울공대의 수학 도사들을 한 곳에 모으게 할 만큼 열의가 있었다, 어느 날 박경찬 교수는 함수(函數)의 집합이 실수(實數)의 집합보다 고차원(高次元)이라는 명제를 증명해 보이려고 칠판 가득히 수식(數式)을 나열해 놓고 있었는데 수강학생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성기수가 나서서 수식 대신 그림을 그려서 명제를 알기 쉽게 증명할 수 있다고 제안, 칠판에 그림을 그려 보였다. 학생들이 이해하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이날 그의 자신감과 용기는 박 교수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강의 직후 성기수는 곧바로 박 교수의 조교로 취직이 됐고 기숙사 생활도 할 수 있게 됐다.
4학년 1학기까지 계속된 조교 생활은 일단 신나는 일이었다.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학비와 겨울철 난방이 잘되는 기숙사방을 제공받을 수 있었고 지긋지긋했던 통학교통난에서도 해방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고등학교 수학교과서 편찬작업을 직접 도울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다. 특히 소코르니코프(Sokolnikoff)의 고등수학과 같은 원서번역 일은 성기수의 영어와 수학실력을 향상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됐다.
57년 가을에 맞이한 4학년 2학기는 취직, 병역의무, 진학 등 세 갈래의 진로에서 고민하던 시기였다. 앞서 언급했지만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상황으로 볼 때 공대 졸업생으로서 마땅한 취직자리를 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조선항공공학과라는 학과전공에 맞는 일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와 같은 일이었다. 그래도 절망하지 않았던 것은 대학원 진학이라는 지상(至上)과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취직은 일단 포기했다.
하나를 포기하고 나니 두 갈래의 길이 동시에 열리는 듯했다. 58년 초 대학원 시험과 공군장교후보생 시험이 잇따라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원에 적을 둔 상태에서 공군에 입대키로 한 것이었다. 장교로 임관되면 군무와 대학원 학업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성기수에게 대학원 진학과 공군장교후보생 지원을 동시에 부추긴 것은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소련의 스푸트닉(Sputnik) 1호였다.
57년 10월 4일, 스푸트닉 1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됐다는 소식은 전세계 특히 미국을 위시한 서방국가들을 충격 속에 몰아넣었다. 스푸트닉 1호는 근지점(近地點, 지구에서 가장 가까워지는 지점) 2백27, 원지점(遠地點, 지구에서 가장 멀어지는 지점) 9백47의 궤도를 유지하면서 지구를 96분만에 한 번씩 도는 캡슐형 위성이었다. 인류역사와 과학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스푸트닉 1호는 우주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메신저였다. 그러나 당시 국제질서를 지배하던 냉전논리(冷戰論理) 차원에서 보면 이 사건은 미국에 대한 소련 항공우주공학의 완전한 승리였고 소련에 대한 미국의 참담한 정치적 패배였다.
대책 마련에 발벗고 나선 것은 백악관이었다. 그동안 산발적으로 수행해오던 우주개발계획들을 대통령 직속의 미항공우주국(NASA)으로 통폐합해 일원화했다. 미국과 소련간 본격적인 우주개발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미, 소(美蘇), 아니 동서(東西)진영의 한치 양보 없는 우주개발경쟁은 앞으로 우주항공 분야가 크게 각광받으리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어떤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선배 박철은 한술 더 떴다. 1년 앞서 학부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해 있던 박철은 어느 날 성기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일단 대학원 시험을 치른 뒤 나와 함께 공군장교후보생에 지원하자. 그래서 항공창(航空廠)에 배속받아 비행기를 만들어보는 거야.』
58년 2월 대학원 시험에 이어 3월 박철과 함께 치른 공군장교후보생 모집 필기시험도 무난히 합격했다. 문제는 신체검사였다. 50도 안되는 왜소체격을 가졌던 성기수는 박철과 함께 병사구사령부(兵事區司令部, 병무청 전신) 신체검사장이 있는 서울 후암동(厚岩洞) 초입 중국집에서 자장면 두 그릇씩과 찬물을 한 바가지씩 나눠먹었다. 체중미달은 면했지만 충치와 치질이라는 복병 때문에 결국은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박철 역시 또 다른 이유가 있어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낙담하고 있는 두 사람 앞에 제복을 입은 공군 중위 한 사람이 나타났다. 조선항공공학과 출신은 아니었지만 안면이 있던 서울공대 선배였다. 공군사관학교 교수부에서 나왔다는 중위는 곧장 신체검사 담당 군의관에게 항공역학(航空力學) 교관요원으로서 두 명의 장교후보생이 필요하다며 성기수와 박철의 합격판정을 요청했다. 참으로 행운이었다. 항공창에서 비행기를 만들어보겠다는 희망은 일단 사라졌지만 오히려 잘된 일인가도 싶었다. 공사 교수부와 서울대 대학원에서 전공분야를 확실히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왔기 때문이었다.
【서현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