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들어 한국산 반도체에 대한 외국 기업들의 적대적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이달 초 미국이 한국산 메모리 반도체에 대해 고율의 덤핑 예비 판정을 내린 데 이어 유럽연합(EU)도 최근 덤핑 제소를 준비하고 있어 선진국들의 「반덤핑 덫」이 국내 반도체산업 회생을 가로막는 악재로 작용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우선 미국 상무부는 예상 밖으로 LG반도체 7.61%, 현대전자 12.64% 등 2개 업체에 고율의 덤핑마진이 있는 것으로 예비 판정을 내려 앞으로 한국산 반도체의 대미 수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이번 예비 판정이 오는 7월에 실시될 최종 판정에서 확정될 경우 해당업체는 5백만∼1천만 달러에 달하는 반덤핑 관세를 물어야 하고 향후 미주지역 D램 수출시에도 이에 상응하는 금액을 미국 정부에 예치해야 하는 등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 독일의 지멘스반도체사 등 유럽전자부품제조업협회(EECA) 소속 유럽의 반도체업체들도 한국의 반도체업체들에 대한 본격적인 자료수집 작업을 거쳐 4월 말 이전에 EU 집행위원회에 공식 제소할 것이라는 소식이다.
이번 유럽 반도체업체들의 한국 업체들에 대한 반덤핑 제소 움직임은 한국반도체산업협회(KSIA)와 유럽의 EECA가 덤핑문제 해결을 위한 자료수집 체계 도입을 조건으로 한국산 반도체에 대한 덤핑 규제를 종료키로 합의한 직후에 발생한 것이라는 점에서 업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더욱이 이번 덤핑 제소의 주도업체로 알려진 지멘스사의 사전 조사작업에 미국의 IBM과 텍사스인스트루먼츠사가 협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데다 최근 미국의 대표적인 메모리 반도체업체인 마이크론사가 IMF 지원금의 한국 반도체업체 지원반대 로비와 맞물려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미, 유럽 반도체업체들의 반덤핑 공세는 대표적인 D램업체인 마이크론과 지멘스사가 최근 메모리 가격 급락으로 반도체 부문의 채산성이 크게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진행되고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메모리 반도체 최대 공급국가인 한국의 원화가치가 2배 가까이 절하된 것도 미, 유럽 업체를 자극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추가 가격하락을 사전에 막기 위한 전략으로 「반덤핑 덫」을 활용한다는 풀이가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다.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은 국내 총 수출액의 1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대표적인 수출형 산업이다. 지난해의 경우 조립분야를 포함한 총 수출액이 1백75억 달러 규모로 전년의 1백78억4천3백만 달러에 비해 1.9% 정도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수출 1위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반도체 수출의 맑음과 흐림에 따라 국내 전체 수출기상도가 변할 만큼 반도체산업이 수출전선에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반도체산업 경기가 다소 호전되고 있는 이때 선진국들이 한국산 반도체의 시장확대를 저지할 목적으로 「반덤핑 덫」을 치고 있는 것은 결코 예사롭운 일이 아니다.
국내 업체들은 이번 반덤핑 예비조사 과정에서 미주지역 수출물량 외에 아시아지역에 수출한 제품이 포함되는 등 공정성이 결여됐다는 이의를 제기해 최종 판정에서 2% 미만의 미소마진 판정을 받겠다는 전략이나 만에 하나 협상을 그르쳐 예비판정이 그대로 최종판정으로 굳어진다면 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최악의 사태를 방지하는 차원에서도 이번 고율판정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론을 찾아내야 한다. 우리도 이에 상응하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미국의 속셈이 드러난 이상 앉아서 그대로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아쉬운 쪽이 먼저 제안을 내야 한다. 정부와 반도체업계가 미국과 EU 등의 덤핑제소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추진키로 한 세계반도체협의회(WSC) 회원국간 반덤핑규제 남발방지 차원의 다자간 기본협약 제정도 효과적인 대안 중 하나다. 미국과 EU측이 우리의 제의를 받아들일지는 의문이지만 최악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카드라도 사용해야 할 판이다.
상보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공정무역 관행을 지켜나가면서 「반덤핑 덫」을 피할 수 있는 대책마련을 하루빨리 마련해야 할 것이다. 사후약방문은 더 이상은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