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한알의 밀알이 되어 (8)

제2부 청년 성기수-로켓탄도 근사공식 (5)

성기수가 교관으로 부임한 지 달포가 지난 58년 10월, 공군사관학교는 진해(鎭海)에서 서울 신대방동(新大方洞) 성무대(星武臺, 지금의 보라매공원)로 이전했다. 입대 전 소원대로 성기수는 군복무와 대학원 진학을 병행할 수 있게 됐다. 대학시절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던 조선항공공학과 선배 겸 친구인 박철(朴哲, 전 NASA연구원, 현 일본 도호쿠大 교수)과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겠지만 50년대 공사 교수부(敎授部)는 대졸출신 장교 후보생들이 가장 선호하던 보직 가운데 하나였다. 60년을 전후해서 성기수와 함께 근무했던 동년배 공사 교관들로는 박철(항공역학)을 비롯, 이현재(李賢宰, 경제학, 전 국무총리), 이명현(李明賢, 철학, 전 교육부 장관), 고(故) 김호길(金浩吉, 물리학, 전 포항공과대 총장), 서정욱(徐廷旭, 전자공학, SK텔레콤 사장), 한필순(韓弼淳, 물리학, 전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 백영학(白英鶴, 전기공학, 전 ETRI 소장), 홍재학(洪在鶴, 항공공학, 전 한국항공우주연구소 소장, 현 단국대 교수), 김정배(金正培, 항공공학, 전 삼성전관 사장) 등이 눈에 띄고 있다.

공사에서 일주일 가운데 나흘은 생도 강의와 강의 준비로 보냈다. 성기수의 전공분야는 항공역학(航空力學)과 초음속공기역학(超音速空氣力學)이었다. 항공역학이란 비행중인 항공기가 공기로부터 받는 힘이나 기계 각 부분에 미치는 기류상태를 연구하는 학문. 비행기의 날개이론과 프로펠러 이론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초음속공기역학은 비행중인 물체 주위에 발생하는 초음속 상태의 공기흐름을 연구하는 분야로서 항공역학과 함께 대표적인 유체역학(流體力學) 응용분야 가운데 하나이다.

일요일을 뺀 나머지 이틀은 교수부장의 양해 아래 박철과 함께 대학원생 신분으로 공릉동(孔陵洞) 서울공대 캠퍼스에 다녔다. 교수 강의제도가 도입되기 전이어서 미국내 저명한 대학원의 교과서 원서(原書)를 정독하는 시간 그 자체가 대학원 과정이었다.

학구파 교관들인 성기수와 박철의 향학열은 유별났다. 수재들이 모인 공사 교수부에서도 두 사람은 알아주는 공부벌레들이었다.

59년 5월 마침내 그들에게도 자신들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국방부과학연구소(國防部科學技術硏究所, 70년 설립된 현 국방과학연구소와는 다름)가 자체제작한 신형 로켓의 탄도(彈道)를 계산해 달라는 공식 요청이었다.

로켓의 물리적 특성은 일반 탄환의 그것과는 다르다. 탄환의 경우 총신 속에서 가속하게 되는 반면 로켓은 분사에 의해 공간에서 가속한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분사가 끝난 로켓은 대부분 관성에 의해 비행하게 되는데 이 비행궤도가 로켓탄도이다. 성기수 팀에게 의뢰된 용역은 바로 이 로켓탄도를 미리 계산해 냄으로써 분사가 끝난 로켓이 어디를, 어떤 방향으로, 얼마의 속도로 날게되는 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국내에서 로켓탄도를 계산해낸 과학자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실제로 과학연구소는 58년 최초의 국산 로켓 제작에 성공했지만 탄도계산을 못해 발사실험에 실패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당시 각국에서는 57년 최초의 인공위성인 소련의 스푸트니크(Sputnik)1호의 발사 성공을 계기로 신형 로켓의 개발과 발사실험이 붐을 이루고 있었다. 과학연구소 역시 5기의 신형 로켓을 제작해 놓고 탄도를 계산해 줄 과학자를 찾고 있었다. 공사 내에서 공부벌레로 소문난 두 항공역학도에게 탄도계산 의뢰가 주어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성기수와 박철은 때마침 차례가 돌아온 교수부 교관연구발표회의 주제발표용으로도 사용할 겸 해서 과학연구소의 탄도계산 의뢰를 쾌히 수락했다. 계산은 주로 성기수가 맡아 했는데 항공역학의 공기저항 이론과 뉴톤의 운동방정식을 적용해서 탁상계산기로 일일이 수치적분(數値積分)해 들어가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나 수치적분 방식은 하루 내내 손가락이 닳고 팔이 떨어져라 계산기를 두들겨도 고작 2, 3초 분량의 탄도만을 계산해 낼 뿐이었다.

사실 관성 비행중인 로켓의 궤도를 일반해석 해낸다는 것은 수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 불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실제로는 해석과정을 적당히 단순화시킨 후 여러 가지의 근사계산(近似計算)을 해내는 방법을 도입하고 있었다. 성기수 팀의 작업 역시 탄도계산용 근사공식(近似公式)을 얻어내는 과정이었다.

이런 전제하에 성기수가 두번째 시도한 것은 해석적 적분(解釋的積分) 방식이었다. 우선 탄도와 수평선이 만들어 내는 각도의 변화가 로켓의 위치나 속도에 비해 매우 느리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고 보면 수치적분 방식이 실패한 것은 시간을 변수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시간 대신 각도를 변수로 삼고 운동방정식 내의 삼각함수(三角函數)를 이용함으로서 해석적적분 방식에 의한 근사 공식이 얻어졌다. 연구를 시작한 지 꼭 두 달 만이었다.

59년 7월 27일 오후, 인천시(仁川市) 고잔동(古棧洞) 일대 서해안의 백사장. 5기의 국산 로켓이 45도 각도로 서해안 상공을 향해 일렬로 늘어서 발사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2시50분 마침내 과학연구소 로켓연구과장 이승원(李承院, 서울대 명예교수)이 쥐고 있던 첫번째 깃발이 번쩍 들어올리자, 로켓이 불기둥을 뿜으며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국내에서는 처음보는 장관이었다. 5기를 쏘아올리는데 모두 35분이 걸린 이날의 실험은 국가적인 대사로 기록될 대성공작이었다.

당시 일본은 연필 크기 만한 로켓을 제작하여 실내에서 발사 실험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이날 국산 로켓의 발사성공은 한국의 과학기술이 국제무대에서 상위권에 속하며 군사적으로는 지대지(地對地), 나아가서는 지대공(地對空)미사일과 같은 전략적 군사무기를 독자 개발할 수 있음을 전세계에 과시한 셈이었다. 이튿날 한 조간신문의 사회면에는 「다섯 종류 로케트 발사 성공」이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머리기사가 실려 당시 상황과 국내외 반응을 짐작케 하고 있다.

『...수만 남녀 중, 고등학생 및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 가운데 리(李)대통령은 대형 헬리콥타로 영식 리(李康石)소위와 함께 임석한 열람대에는 이(李在鶴)국회부의장 하(河)국방위원장 및 김(金貞烈) 국방부장관 등 3부 요인과 백(白善燁)연합참모본부 총장, 3군 참모총장 및 한, 미 고위장성 다수가 참석하였다.』 - 서울신문 4292(1959)년 7월28일 -

한편 미국은 이때 스푸트니크 1호에 자극받아 백악관 직속의 국립항공우주국(NASA)을 발족시키는 등의 본격적인 대응책 마련에 나서고 있었다. 소련의 선수에 자존심이 상했다는 차원을 넘어 국가안보체계의 위태로움을 직감한 젊은 대통령 케네디는 58년 연방의회에 대한 교서(敎書)에서 다음과 같이 공언(公言)하기에 이르렀다.

『60년대 안에 유인(有人) 우주선을 달에 안착시킬 것이며 우주인이 살아서 지구에 돌아 올 수 있도록 하겠다』

이 같은 방침에 따라 50년대 말부터 미국정부는 본격적인 우주개발에 나서기 시작했고 관련 대학 및 연구소에 대해 체계적인 지원이 따랐다. 미국 내 이런 분위기는 막연하나마 미국 유학을 꿈꾸어온 성기수를 크게 자극했다. 로켓탄도 근사공식을 만들어낸 이후 어떤 것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까지 생겼던 터였다.

그러던 중 성기수는 로켓탄도 근사공식을 더욱 체계화시킨 논문이 저명한 항공우주과학 학술지 「 Journal of The Aero/Space Science 」 60년 4월호 독자연구란에 실리게 됐다. 박철이 「Two Analytical Results of Fin-Stabilized Rocket Trajectory under Quadratic Drag Law (공기저항을 고려한 두 가지 방법의 로켓탄도 근사공식)」라는 제목으로 영역하고 K. Sung(성기수)과 C. Park(박철) 공저(共著) 형식으로 기고한 한 것이었는데 애당초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어서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던 일이었다.

이에 앞서 60년 2월 성기수는 서울대 대학본부 게시판에 나붙은 하버드대학원의 「고든 맥케이(Gordon McKay)장학생」 모집공고를 보았다. 그러나 학교 측은 전임강사 이상과 학부성적이 우수한 학생만 추천한다는 내부 방침을 정해놓고 있었다. 어느 경우에도 자신이 추천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부터는 차라리 오기가 생겼다. 60년 9월에 유학을 떠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하버드대학원과 브라운대학원에 직접 편지를 내서 받아낸 입학원서와 장학금신청서를 우편 접수시켰다. 장학금 신청의 경우 평균 B학점에 불과해서 거부될 것이 뻔했지만 입학금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유학은 떠날 수조차 없는 상황이어서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산이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Journal of The Aero/Space Science」에 논문이 실린 직후 성기수는 즉시 이 사실을 하버드대학원과 브라운대학원의 입학심사 담당교수에게 알리는 편지를 썼는데 그에 대한 회신이 온 것이다. 두 대학원 모두에서 학비전액을 장학금으로 지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토록 소망하던 미국 유학에 대한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서현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