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케임브리지의 동양인-케임브리지, 1961년 봄 (1)
공군 중위 복장의 동양인 청년 장교 한 명이 두리번거리며 막 안착한 707제트여객기의 트랩을 내려섰다. 말로만 전해 듣던 이국의 정취는 활주로 주변에 1m씩이나 쌓여 있는 설경(雪景)만으로도 실감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도쿄에서 하룻밤을 묶고 앵커리지와 시애틀을 거쳐 시카고에 기착(寄着)한 것까지 포함하면 꼬박 사흘을 날아 도착한 보스턴이었다. 이 동양인에게 생전 처음 밟아본 미국의 땅은 모든 것이 낮설기만 했다.
성기수, 그가 마침내 그토록 그리던 하버드 대학원을 찾아 미국 땅에 날아온 것이었다. 지금의 국내선 터미널의 시설이 전부였던 당시 서울의 김포비행장 출국장에서 어머니와 서울의 작은누님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도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마음이 놓이지 않던 그였다. 출국수속이 계속 늦어지자 그는 불안하기조차 했다. 기내에 탑승해서 좌석에 앉았을 때도 그는 누군가 달려와서 출국 부적격자라며 자신을 끌어내릴 것만 같았다. 그랬다. 성기수는 공항의 출입국 검역소 통과가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진행성 폐결핵 환자였다. 미국 본토의 첫 기착지 시애틀 공항에서 한바탕 마음졸임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시애틀 공항의 공의(公醫)가 짐을 빼앗다시피 받아들고 그를 곧장 공항의무실로 데리고 갔을 때 그는 일말의 불안감과 죄책감으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국 전 서울 종로2가의 한 엑스선과(X線科)에서 위조한 자신의 엑스레이 사진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다행히도 공의는 공항의무실에 보관해 놓고 있던 6개월 전 사진과 성기수가 휴대하고 있던 위조된 사진을 비교해 보고는 OK판정을 내렸다.
비행기가 끝없이 펼쳐진 태평양 망망대해를 나는 동안 성기수는 전쟁 통에 비명에 간 아버지의 유언(遺言)과 출국장에서 시종 근심어린 표정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몇 번이고 전의(戰意)를 다졌다. 아버지가 평소 어린 성기수에게 입버릇처럼 들려주던 말이 『남아입지출향관 학약불성불사환(男兒立志出鄕關 學若不成不死還, 남아가 뜻을 세워 고향을 떠나거늘, 배워 이루지 못하면 죽어서도 돌아오지 마라)』이었다. 50년 가을 낙동강(洛東江)변의 부역자(附逆者) 처형장으로 끌려가기 전날 밤도 아버지는 그 말을 남겼다. 참으로 명언이었다.
하버드대학교가 있는 캐임브리지(Cambridge)는 찰스(Charles)강을 사이에 두고 대서양 연안의 보스턴과 마주하고 있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매샤츄세츠주 주도(州都)인 대(大)보스턴시를 구성하는 인구 10만의 위성도시에 불과하지만 하버드대학교와 매샤츄세츠공과대학(MIT)등 60여 개나 되는 대학들이 몰려 있는 전형적인 교육문화 도시였다.
로건 공항에서부터 짐을 들고 혼자 묻고 물어서 하버드대 문리대학원 응용물리공학부에 도착했다. 출국 전 그 귀한 휴대용 라디오를 하나 구입해서 AFKN뉴스를 들으며 열심히 갈고 닦았던 영어는 그러나 실제 겪어보니 너무나 짧고도 짧았다. 응용물리공학부 사무실에서 중년의 여비서와 대화를 시도했으나 서로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결국은 여비서의 제안으로 필담(筆談)을 시도하고서야 간신히 의사소통이 됐다. 참을 수 없는 수치감과 모멸감도 잠시, 앞으로 어떻게 강의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앞섰다. 성기수가 입고 있던 공군중위 복장도 주위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여비서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기숙사 방에서 짐을 풀 때까지도 어느 나라의 무슨 유니폼인가를 묻는 사람까지 있었다.
캐임브리지에 도착한 이후 개강일까지의 보름 동안이 뒤돌아 볼 겨를도 없이 흘렀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짧은 영어가 갑자기 능숙해질 리도 만무했다. 학칙이나 관례 같은 것을 누구하나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 모든 것을 혼자 묻고 터득해야만 했다. 당초 예정 대로 가을학기에 입학했더라면 학교 측이 마련한 정규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여 대학원 생활에 익숙해 지는데 큰 도움이 됐을 터였다. 하지만 봄학기, 즉 학기 도중에 입학하는 외국인 학생은 성기수 외에는 거의 없어 학교 측에서도 별도의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가 없었다. 식당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이용하는가, 또 병원, 식료품 가게, 도서관, 서점은, , , 내의와 양말 등의 어떻게 세탁하는가. 모든 것을 혼자 터득해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예순이 훨씬 넘은 성기수는 요즘도 앞 머리칼을 이마 한가운데서 일(一)자로 반듯하게 자르는 짧은 상고머리 헤어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이 헤어스타일이 40여 년 동안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돼버린 것도 이 시절의 어설픈 영어실력 때문이었다.
한번은 이발소에 갔는데 이발사가 원하는 헤어스타일을 묻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는데 이발사가 부르릉거리는 전동 이발기를 들더니 갑자기 머리 뒤에서부터 고속도로를 내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성기수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이 탄로가 날까봐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까까중에 가까운 머리가 되고 말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발사는 『Crew cut(선원처럼 짧게 깎을까요)?』 이라고 물었는데 그것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성기수는 수동 커터기와 가위를 사다가 기숙사에서 거울을 보며 직접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는데 스스로 보기에도 괜찮았다.
61년 2월 6일의 개강 일이 닥쳐오면서부터 성기수는 수강 신청할 과목 선택에 골몰해야 했다. 전학기 장학생인 그에게는 수강과목 모두에서 A학점을 취득해야만 다음 학기 장학금이 보장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영어에 자신이 없었던 그로서는 일단 평이한 과목을 골라 신청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인 듯싶었다. 더욱이 학년 도중이어서 모든 과목들의 학과진도가 이미 절반쯤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고른 것이 응용수학, 유체역학(流體力學), 열역학(熱力學), 전자기학(電磁氣學) 등 4과목이었다.
강의시간에 교수의 말은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교수가 다음 강의시간이나 장소 변경을 전할 때도 이를 알아 듣지 못해 낭패를 본 일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A학점은 따 놓은 당상이라며 선택했던 열역학 과목이었다. 고전(古典) 열역학인 줄 알고 신청했던 이 과목은 몇 번 수강해 보니 물리학과나 화학과 박사과정 2~3년차 학생들이 선택해야 적합한 양자통계(量子統計)열역학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 과목에서 C학점이 나오게 되면 장학금은 끝이었고 캐임브리지를 떠나 귀국해야 할 판이었다. 다행히도 유인물로 제시되는 과제는 대학도서관을 찾아 자습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사실상 독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대학도서관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도서관 장서 가운데는 교수가 지정한 참고서적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책은 모두 합쳐 3~4권 정도여서 다른 학생들이 먼저 대출해 가버리면 반납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할 수 없이 대학원 측에서 기숙사 비용 등으로 지급하는 생활비로 몽땅 참고 서적을 구입하는 데 써버렸다. 다음 학기부터는 기숙사를 나와야만 했다.
학업에 지장을 주는 것으로는 이밖에도 선천적으로 허약한 체질도 단단하게 한 몫을 거들었다. 한번은 개강 첫 학기 중간 시험을 앞두고 기숙사에서 한밤중에 배탈이 나 미국인 룸메이트에 의해 병원에 실려간 적도 있었다. 첫 중간시험에서는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행운도 따라줬다. 유체역학 과목 시험시간이었다. 3개의 문제 중에서 가장 쉽다고 여겨진 하나를 자신 있게 풀었다. 두 번째 문제는 답안을 만들려고 안간힘을 다 썼으나 어딘가 문제 자체에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아서 속수무책으로 시간만 낭비하다가 말았고 세 번째는 아예 손도 대지 못한 채 답안지를 제출하고 말았다.
거의 죽고 싶은 심정에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교수의 성적발표는 의외였다. 두 번째 문제는 처음부터 잘못 출제된 것이었는데 이를 풀지 않고 놔둔 학생이 정답을 맞췄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 문제는 워낙 어려워 답을 낸 학생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성기수의 유체역학 성적은 선두그룹에 끼일 수 있었다.
사기가 충천해진 마음은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져 기숙사 식당에 내려가 아침을 들고 있는데 10여명의 동료 학생들이 갑자기 성기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날은 미국 시각으로 61년 5월16일이었다. 성기수가 한국의 현역 공군장교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던 동료들은 그에게 간밤에 서울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민주당 정권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동료들은 거기서 나아가 성기수가 하버드의 지성인답게 서울의 군사정권을 비난하고 미국으로 망명하겠다는 의사표시를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그들 중에는 빨리 망명 성명(聲明)을 발표하라고 독촉하는 이도 있었다.
불과 넉 달 전, 4.19 직후 변해버린 서울의 모든 것을 보아왔던 성기수였다. 하지만 그는 동료들을 향해 별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듯 불쑥 말했다. 『모르기는 해도 아마도 한국이 잘될 징조인 것 같다』 잔뜩 들떠 있던 주변의 동료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더니 이내 누군가 그의 말을 받았다.
『군인은 역시 별수 없군!』
<서현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