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전자 M이사(45)가 3년 전 미국 최고 정보통신회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한 이유는 오직 한가지. 그동안 미국 최고 명문대학과 기업에서 공부하고 연구한 경험을 살려 국내 정보통신 산업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소박한 애국심 때문이었다.
그는 H전자 입사와 동시에 이 회사의 핵심사업인 이동통신 단말기를 개발하는 연구팀장을 맡았고 지난해 차세대 기술로 통하는 CDMA방식의 PCS를 개발하는 등 탄탄대로를 질주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러한 꿈은 그가 올해초 단행된 그룹임원 인사에서 「이름뿐인」 고문으로 일선에서 물러남으로써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M이사는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해보았지만 「상처뿐인」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곳은 이국 땅 어디에도 없었다.
H전자는 우리나라 최대 재벌의 계열사로 불과 몇년 전만 해도 다른 대기업들과 미래산업으로 통하는 정보통신 분야 사업확장 경쟁을 벌이면서 이 회사 특유의 「저돌적인」 사업추진 방식으로 경쟁업체들을 압도했던 회사다.
그러나 이 회사는 최근 「중, 장기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면서 앞으로 2, 3년 동안 직원 2만1천명 가운데 40%에 해당하는 8천명을 감원하겠다고 밝혀 역시 「H전자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이 계획안에 따르면 글로벌스타 사업본부 등 다수 사업부가 완전히 없어지게 될 뿐만 아니라 미국 유니시스, 선마이크로시스템스 등으로부터 컴퓨터 시스템을 수입, 주로 국내 계열사 등에 판매하던 정보시스템 사업본부는 자회사로 이관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이 계획안이 속속 실행에 옮겨질 2, 3년 동안 이 회사 직원들은 M이사와 같은 불행한 실업 「눈사태」를 수도 없이 맛볼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정보통신업계 관계자들은 전망하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같은 대량해고 사태가 결코 H전자 한 회사에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며 또 이들의 구조조정작업이 대부분 무원칙하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H전자 못지 않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S전자, L금속, L산전 등도 최근 수천명의 직원을 감원하는 것을 전제로 한 구조조정계획을 확정, 곧 실행에 옮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들이 만든 구조조정계획이라는 것도 대부분 「전 직원의 20∼30% 감원 원칙」 등만 정했지 그들을 어떻게 내보낼 것인가, 또 어떤 사업부를, 왜 어떻게 폐쇄할 것인가 등 정작 핵심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함구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사회, 경제적인 혼란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S전자에서 프로그램 개발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한 관계자는 『우리 그룹만 하더라도 S전자, S정보통신 등 두개 회사가 SI사업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계열회사끼리 과당경쟁을 하는 경우가 흔히 발생하고 있다』며 『그룹차원의 구조조정이라면 당연히 이러한 사업을 어떻게 통합할 것인지를 먼저 결정한 후에 유휴인력 문제를 검토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고 있다.
또 L소프트웨어 관계자도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회사경영 방식이 경직된 것으로 유명한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소프트웨어 개발사업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난센스』라고 혹평했다. 그는 이어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그대로 둔 채 회사가 조금 어려워졌다는 것을 핑계로 그동안 경제성장의 주역이었던 회사 직원들을 해고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정책』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나라 제조업의 경우 인건비가 제품의 제조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기껏해야 15%선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의 주장이 결코 억지 생트집이 아님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서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