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한알의 밀알이 되어 (14)

제4부 제3공화국과 경제개발-금의환향 (1)

성기수가 하버드대학교에서 2년 만에 기계공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것은 63년 7월말이었다. 지루했던 장마가 막 끝나고 폭염이 시작된 김포비행장 입국장 앞에는 어느 새 60줄에 들어선 노모(老母)와 서울의 작은누님 가족, 대학 때 친분을 나눴던 이시윤(李時潤, 전 감사원장), 한마을에서 자랐던 고향친구 이재순(李載淳, 현 건국대 교수) 등 친지와 친구들이 카메라를 들고 마중나와 있었다. 입국장에 들어서는 성기수는 환영객들의 예상과 달리 군용 버클이 달린 허름한 군복바지와 셔츠 차림이었다. 누군가 농반진반으로 『하버드 박사가 왜 이리 남루한가』라는 말을 던지긴 했지만 환영객 모두는 하버드대학교 3백년 역사를 고쳐 쓰고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성기수를 진심으로 환영해 줬다.

8월부터 성기수는 유학 전 근무지였던 공군사관학교 교수부 소속 항공역학(航空力學) 교관으로 복귀했다. 군복무 기간도 어느 새 6년째로 접어들어 복귀와 함께 계급도 대위로 승진했다. 9월부터는 모교인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선항공공학과(造船航空工學科)에서 점성유체역학(粘性流體力學) 강의에 나섰고 64년부터는 자리를 옮겨 문리대 천문기상학과(지금은 자연대 소속)와 대학원 물리학과에서 전자기학(電磁氣學)과 자기유체역학을 강의했다.

66년부터는 서울대 행정대학원과 경영대학원에서 하버드 박사후과정 연구원 때 독학으로 배웠던 포트란(FORTRAN)언어 입문과 운용과학(運用科學, OR:Operation Research) 과목을 맡아 출강하기 시작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은 당시 원장이던 이한빈(李漢彬, 전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의 요청으로, 경영대학원은 당시 세계계량경제학회 회장이던 변형윤(邊衡尹, 현 서울대 명예교수)의 요청으로 각각 이뤄진 것이었다. 이한빈은 51년 하버드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받은, 성기수의 동문이기도 했다.

성기수가 강의했던 OR은 비공식적으로 국내 최초로 기록되고 있다. 포트란 강의는 당시 국내에 단 한 대의 컴퓨터도 없어 강의실 칠판에 플로차트(Flow Chart)를 그려 놓고 문법이나 구분규칙 등을 이해시키는 정도였지만 새로운 분야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수강생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의 강의 내용은 하버드에서 방금 배워온 따끈따끈한(?) 것들이기도 했다.

강사 시절부터 성기수가 신경을 썼던 것은 하버드에서 초단기 박사학위를 받아낸 자신의 명성을 십분 활용하여 후배들에게 해외유학을 주선해 준 일이었다. 유학추천에 그처럼 적극적이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처절하게 경험했던 고학(苦學)에 대한 쓰라린 기억들을 염두에 둔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에서부터 하버드 유학까지 고학 시기를 거치면서 성기수는 스스로 귀중한 교훈 하나를 얻고 있었다. 사람이란 어떻게 훈련하고 노력하게 하고 활용해 주느냐에 따라 훌륭한 인재로 거듭나느냐, 범재로 남느냐를 판가름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제자를 둔 스승이나 부하를 거느리는 상사의 덕목이기도 했다. 귀국 직후부터 67년 구(舊)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전자계산실장으로 부임해서 오늘날 공직생활을 마감할 때까지 제자나 후배들에게 실천한 교훈 하나가 바로 유학이나 장학금을 주선해 주는 일이었던 것이다.

70년대 중반까지 10여년 동안 성기수가 주선하거나 소개한 장학금으로 유학을 간 사람들은 줄잡아 40여명이나 된다. 해외유학은 아니었지만 배움의 길을 주선하여 박사학위를 받도록 해준 후배들까지 합치면 이보다 훨씬 많다. 초창기인 68년부터 KIST전산실에 근무했던 김길조(金吉助, 현 중앙대 교수)는 『성 박사가 직접 학위를 수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분 밑에서 일했던 연구원 가운데 50여명이 박사학위를 받았다』며 이것은 『연구원들로 하여금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줬을 뿐 아니라 새로운 연구과제에 대한 적응력을 길러준 은덕 때문』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성기수가 유학을 주선했던 이들 가운데는 미국 텁츠(Tufts)대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정오(李正五, 전 과기처 장관, 현 KAIST 명예교수)와 하와이대에서 시스템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안문석(安文錫, 고려대 정책과학대학원장), 미시간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명재(李明宰, 현 부산대 교수) 등이 있다.

32년생으로 성기수보다 두 살이나 많았던 이정오 역시 나이에 비해 비교적 늦은 시기인 57년 육사(13기)를 마친 뒤 서울대에 편입해서 61년 학사 졸업했다. 이정오가 성기수와 만난 것은 64년 서울대 대학원 물리학과에서 교수와 제자 사이로였다. 이때 성기수는 보스턴의 명문 텁츠대의 기계과 주임교수였던 한국계 해리 최(崔)를 통해 이정오의 유학을 주선해 줬다. 그러나 두 사람은 80년 8월 서로 직위가 바뀌어 다시 만나게 된다. 성기수가 구(舊) KIST 전산개발센터(현 시스템공학센터 전신) 담당부장 겸 시스템연구 담당 부소장으로 있을 때 구 한국과학원(KAIS, 현 KAIST)교수였던 이정오가 직속 상관인 KIST 소장으로 부임(겸임 대리체제)한 것이다. 이어서 이정오는 이후 80년 12월 KAIS와 구 KIST가 통합하여 발족된 한국과학기술원(KIST)의 초대원장으로 정식 취임했다가 1주일 만에 출연연구소를 관장하는 과기처 장관에 영전됐다. 이정오는 또 장관 임기가 끝난 직후인 86년부터 (88년까지) 다시 KIST 원장에 복귀하는 등 근 10년 가까이 성기수를 지휘할 수 있는 자리에만 올라 둘 사이가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안문석의 경우는 66년 당시 송인상(宋仁相, 전 부흥부 장관, 현 한국능률협회그룹 회장)이 주도하던 한국경제개발협회(KDA, 지금은 존재하지 않음)에서 성기수와 만나 인연을 맺은 뒤 지금까지도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당시 성기수는 이한빈의 추천으로 KDA에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67∼71년)에 덧붙이게 될 15개년 장기계획을 수학적으로 계량(計量)해내는 작업을 하던 중이었고 안문석은 서울대 행정대학원 조교로서 이명재, 이승윤(李承允, 작고, 전 아시아개발은행 이사)과 함께 성기수를 보조하고 있었다. 안문석은 67년 12월 이명재, 이승윤과 함께 성기수를 따라 KIST전산실 창설 3인방이 됐으며 78년 KIST전산시스템개발실장을 끝으로 고려대 행정학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계속 시스템공학 발전이나 정보화 분야에서 성기수를 도와 왔다. (KDA와 안문석 등에 대한 이야기들은 나중에 자세하게 소개할 예정이다)

성기수가 65년부터 67년 말 KIST전산실 창설 직전까지 KDA에서 3년 동안 중책인 조사역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귀국 직후 경제학, 특히 당시 한국에서는 거의 신학문이라고 할 수 있었던 계량경제학(計量經濟學) 공부를 틈틈이 해둔 덕택이었다. 계량경제학은 케네디와 존슨 민주당 정부가 추진하던 미국의 장기 경제부흥 정책의 이론적 근거이다. 기계공학 박사였던 그가 계량경제학 분야 교과서들을 접하게 된 것은 참으로 우연이었다.

미국에서 귀국을 1주일 쯤 앞둔 어느 일요일, 성기수는 평소 안면이 있었던 선배 정재식(鄭在植, 在美)의 집에 초대를 받아 하룻 동안 고국의 상황에 대해 토론할 기회를 가졌던 적이 있었다. 정재식은 이화여고(梨花女高) 영어교사를 하다가 평소 뜻을 뒀던 신학(神學)공부를 위해 유학 중이었다. 자주 한국을 드나들던 정재식은 귀국을 앞둔 성기수가 자신이 미국에서 배운 기계공학과 컴퓨터 등 과학기술을 조국의 경제개발에 접목시켜 보겠다는 포부를 밝히자, 이렇게 충고했다.

『서울의 신(新)정부는 군부나 법대(法大) 등 인문사회계열 엘리트들이 장악하고 있을 테니 경제공부를 좀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네. 처음부터 과학기술을 들이댄다면 그들은 자네의 이야기를 알아듣지도 못할 뿐 아니라 무시당하기 십상일세. 과학기술을 경제논리적 관점에서 논한다면 그만큼 설득력이 있지 않겠는가? 내 자네가 읽을 만한 책 한 권 추천해 주지.』 정재식이 성기수에게 추천해준 책이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경제학과 교수인 새뮤얼슨(Samuelson, Paul Anthony)의 경제학 입문서인 「경제학(Economics)」이었다. 귀국 하루 전 서점에 들러 새뮤얼슨을 구입했다. 하지만 성기수의 관심은 그래도 과학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서가에서 「경제학」을 고르는데 러시아의 장님 수학자 폰트리야긴(Pontryagin, Lev Semyonovic)의 「최적과정의 수학적 원리」가 먼저 눈에 띠었을 정도였다.

8백여 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경제학」은 귀국 후 1주일 만에 독파했다. 『어디 한번 읽어나 볼까』 하는 심산으로 첫장을 넘겼는데 전반적인 내용들이 다음 장을 넘기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끌리는 것들이었다.

「경제학」은 계량경제학의 입문서였고 저자인 새뮤얼슨은 미국 민주당 정부의 경제 브레인이었다. 성기수가 공감했던 것은 계량경제학의 이론이 경제개발에 착수한 우리나라 경제환경에서 매우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겠다는 점이었다. 경제이론에 수학을 접목시킨 것도 관심을 끌게 했다. 「경제학」을 1주일 만에 독파한 뒤 성기수는 무한한 가능성과 경외감에 사로잡혀 저자인 새뮤얼슨에게 장문의 독후감과 함께 자신이 진지하게 경제공부를 하고 싶은 이유를 적은 편지를 섰다. <다음주 목요일자에 계속>

<서현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