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세계] 칩들의 전쟁은 계속된다

엄지손가락 굵기의 칩은 그 자체로서 대도시나 다름없다. 0과 1이 초고속으로 지나가는 복잡한 길들과 암호를 해석하고 정보를 가공하는 공장들이 단지를 이룬 직사각의 전자기판. 하나의 칩은 말하자면 세계최고의 젊은 두뇌들이 건설한 마이크로폴리스다.

인텔은 칩으로 이루어진 신도시의 맹주로 군림해 왔다. 사이릭스와 AMD, IDT 등이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있으나 1위의 아성은 아직 견고하다. 호환칩업체들은 그동안 「도시의 안락함은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공사비만 낮춘다」는 전략하에 도로의 폭이나 건물 층수를 조정하고 아키텍처를 일부 바꾸는 식의 설계도 변경으로 인텔에 대항해왔다.

그러나 영원한 절대강자란 없는 법. 엔딩이 보이지 않는 전략시뮬레이션게임처럼 칩들의 전쟁은 새로운 스테이지가 전개될 때마다 신병기들을 쏟아내고 있다. 8086에서부터 펜티엄Ⅱ까지 18년에 걸친 레이스에서 독주를 지켜온 인텔은 올봄 펜티엄Ⅱ칩에서 L2캐시와 기계적 부품을 뺀 2백66㎒ 보급형 펜티엄Ⅱ(셀러론)을 내놓았다.

이는 지난해 미국에서 시작된 1천달러미만의 저가PC 돌풍으로 호환칩업체들의 시장점유율이 높아져 그동안 80%가 마지노선이었던 인텔의 세계시장 시장점유율이 최근 75%대로 떨어지는 등 전선에 이상기류가 감지됐기 때문이다. 인텔은 앞으로 고급PC시장을 겨냥한 3백50 및 4백㎒급의 지온프로세서와 저가PC시장을 공략할 셀러론으로 마케팅을 이원화시켜 공세를 펼 계획이다. 여기에다 내년에 머세드라는 핵폭탄 투하로 서버시장을 장악하게 되면 PC시장에서도 80%이상의 시장점유율을 회복할 것이라는 게 인텔측의 전망이다.

한편 저가PC 바람을 타고 있는 호환칩진영의 공세도 만만치 않다. 이들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PC시장에서 거함 IBM을 타이태닉호의 운명으로 몰아가고 있는 컴팩의 대역전드라마를 재연시킬 꿈을 갖고 있다. 국내시장의 경우는 아직 10%미만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해 절대적인 약세를 보이고 있지만 차츰 전열을 정비할 방침이다.

지난해 내셔널세미컨덕터라는 든든한 후견인을 만난 사이릭스는 초염가 CPU인 미디어GX 덕분에 미국에서 PC 1백대 중 7대꼴로 팔린다는 컴팩 프리자리오를 파트너로 맞이해 한창 상승무드를 타고 있다. 이 회사는 올 2, 4분기부터 MⅡ 300을 전방에 배치했다. 사이릭스측은 이 제품이 강화된 메모리관리기능과 진보된 아키텍처를 구현해 2백66㎒ 셀러론의 가격에 펜티엄Ⅱ 300㎒의 성능으로 무장된 신병기라고 장담하고 있다. 테스트결과 같은 가격대인 셀러론266보다 25% 정도 속도가 앞선다는 것.

AMD도 인텔추격전에 나섰다. 1백㎒ 버스클록 지원으로 PC시스템 전체 성능을 높혀주고 3D 애플리케이션에서 능력을 발휘할 K6 3D와 K6 3D+가 주력부대. 이 회사가 숨겨놓은 비장의 카드는 디지털 이퀴프먼트사의 기술을 라이선스해 펜티엄Ⅱ와 같이 슬롯1을 지원할 K7으로 내년초에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이들 인텔호환칩업체들은 부동소수점연산성능과 3D기능이 대폭 강화된 2세대 MMX기술을 공동으로 개발해 올하반기부터 3백㎒급 칩에 잇따라 적용시킴으로써 PC메이커들이 7백~8백달러대 신제품을 내놓도록 부추길 전망이다. 또한 저가제품군뿐 아니라 고급형시장에서도 정면승부를 펼칠 계획이다.

이같은 칩들의 전쟁을 지켜보는 전문가들의 관전평은 『그동안 인텔이 대체로 12개월 정도 앞선 기능과 「인텔 인사이드」라는 브랜드 파워로 전세를 리드해 왔으나 앞으로 저가형PC시장이 확대되면 호환칩업체의 대공세가 시작될 것』으로 예고하고 있다. 결국 승패는 컴팩, IBM, HP, 델, 패커드벨 등 칩으로 이루어진 마이크로폴리스의 실질적인 입주업체들이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에 달려있다.

처리속도 0이라는 불가능의 고지를 향해 무한궤도를 달려야 하는 칩들의 전쟁에 있어서 마지막 라운드란 있을 수 없다. 1밉스(Million Instruction Per Second)라도 빠른 속도와 독자적인 아키텍처로 무장한 신형병기가 등장하는 한 칩들의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이선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