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한알의 밀알이 되어 (15)

제4부 제3공화국과 경제개발-새뮤얼슨의 편지 (2)

성기수가 귀국한 63년 즈음, 우리나라는 이미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62~66년)이 추진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농가인구가 전체의 58%를 차지하는 전형적인 농업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국제 교역량도 수출이 5천5백만 달러, 수입이 4억2천만 달러(62년 말 기준)하던 시절이었다. 공업화나 근대화 척도의 하나인 제조업의 시간당 임금수준도 당연히 국제수준에 크게 못 미쳤는데 62년의 예를 들면 한국은 0.115달러로서 2.32달러인 미국의 2백분의 1에 머물고 있어 세계 최하위 그룹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5.16으로 정권을 잡은 군부는 군정(軍政)을 연장해 가면서 사회안정과 경제안정을 꾀하려 했지만 실업인구는 이미 총인구의 7분의 1 수준인 4백만명을 넘어 서고 다수 국민들은 절대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정치적 안정과 함께 실업문제 및 절대빈곤을 해결해야만 했던 군부는 이때 「선건설, 후통일」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자립경제」와 「조국 근대화」를 목표로 하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귀국후 두 달이 채 못된 63년 9월, 성기수는 매샤츄세츠공과대학(MIT) 경제학과 교수 새뮤얼슨으로부터 친필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귀국하면서 사들고 들어온 경제학 입문서 「경제학(Economics)」을 읽고 저자인 새뮤얼슨에게 직접 독후감을 써보낸 지 3주 만이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새뮤얼슨에 보낸 편지에서 성기수는 자신을 하버드대 기계공학 박사라고 소개하고 비경제학도로서 「경제학」을 읽고 느낀 점들을 자세하게 적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미국에서 배운 신기술을 한국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사용하기 위해 개량경제학(計量經濟學)을 공부하고 싶다고 솔직하게 적고 공부에 필요한 책을 추천해 달라는 말을 넣었다. 행간의 뜻으로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신(新)정부 관리들을 설득하기 위한 이론적 무장을 하고 싶다는 얘기였다.

답장에서 새뮤얼슨은 『성(成) 박사가 나의 저서 「경제학」을 읽고 생각한 것은 내가 그 책을 집필하면서 염두에 뒀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며 『한국의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고 싶어하는 성 박사를 멀리서 돕고 싶다』는 요지의 글을 적고 있었다. 새뮤얼슨은 또 『경제공부를 더 하고 싶다면 다음 과정의 책을 추천하겠다』며 자신의 저서 「경제분석의 기초(Foundations of Economy Analysis)」 등 3권의 책을 추천해 줬다.

새뮤얼슨의 편지는 자상하면서도 당대 최고의 경제이론가이자 대석학(大碩學)으로서 진정한 품격 같은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성기수가 감격한 것은 바로 그런 점 때문이었다. 새뮤얼슨의 입장에서 보면 무턱대고 독후감을 써 보낸 성기수의 행동을 그저 아시아의 어떤 후진국에 살고 있는 청년의 객기 쯤으로 치부해 버리며 답장을 보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뮤얼슨은 이 용기있는 동양의 청년 기계공학자의 편지가 담고 있는 뜻을 정확히 꿰뚫었을 뿐 아니라 자신감까지 불어넣어 준 것이었다.

현대 계량경제학의 대부인 새뮤얼슨의 이론적 계보는 케인즈학파의 좌장인 케인즈(Keynes, J. M.)의 「고용과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 Money);보통 일반이론으로 줄여 부름)」에서 출발하고 있다. 케인즈학파의 복음서로 통하는 「일반이론」에서 케인즈는 소비와 투자 즉, 유효수요(有效需要)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공공지출과 같은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어 정부가 조세, 화폐, 금융, 재정정책 등 인위적인 간섭을 통해 유효수요를 창출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같은 거시분석(巨視分析)이론은 완전고용에 이르기 위해 수요와 공급의 자유방임을 주창했던 고전학파 스미스(Smith, Adam)의 「보이지 않는 손」 이론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다. 또 고전학파를 계승한 신고전학파의 미시분석(微視分析) 이론과도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새뮤얼슨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케인즈가 간과했던 미시분석 이론을 「일반이론」에 가미했다. 새뮤얼슨이 40~50년대에 주장했던 신고전파종합(Neo-Classical Synthesis)은 이 같은 학문적 성과를 일컫는 용어이다. 개인의 행복량(量)으로 사회 전체의 복지량(量)을 측정해 내는 후생경제학(厚生經濟學)이나 경제이론을 통계학과 수학에 접목시켜 경기순환과 경제성장 모델을 수치로 제시 해내는 계량경제학(計量經濟學) 분야는 그의 전문분야이다. 새뮤얼슨은 약관 24세 때인 39년, 자발적인 투자가 소비를 증대시킨다는 승수(乘數)이론과 소비증대가 다시 투자를 유발시키는 가속도원리(加速度原理)를 종합하여, 그 유명한 <정차방정식(定差方程式)>을 완성하게 된다. 이 방정식은 현재 경기순환이 어떻게 이뤄지는가를 설명해주는 계량경제학의 기본 공식이 돼 있다. 「정차방정식」의 완성은 새뮤얼슨이 물리와 수학에 능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 그는 시카고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학원에 진학하여 물리학과 수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한바 있다.

계량경제학은 60년대 초반 미국정부가 추진했던 경제의 장기번영 정책, 이른바 「성장이론」의 씨앗이 된 학문 분야이다. 민주당 정책은 우선 정부가 재정과 금융정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미국 경제가 지닌 잠재적 성장력을 최대로 발휘시켜 국민총생산 갭(GNP Gap:완전고용시의 GNP와 불완전고용시의 GNP의 차이, 0에 가깝도록 하는 것이 성장이론의 기조이다)을 극소화시키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정부의 간섭 때문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물가 등귀 현상이었다. 여기서 새뮤얼슨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각종 규제의 범위, 임금인상률, 외환 보유고 한도액 등을 제시하는 가이드라인(Guideline)의 채택을 주장하게 된다.

편지에서 새뮤얼슨이 추천한 3권의 책은 「경제분석의 기초」 외에 현대 미시이론의 거장 힉스(Hicks, J. R.)의 「가치와 자본(Value & Capital)」, 콴트(Quandt, R. E.)와 헨더슨(Henderson, J. M.)의 공저 「미시경제학이론(Microeconomics Theory)」 등으로서 모두 50~6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널리 읽히고 있던 계량경제학의 고전들이었다. 이 가운데 「경제분석의 기초」는 30~40년대의 젊은 시절 새뮤얼슨의 이론이 집대성된 것으로서 가치관이 우선된 경제이론을 정교한 수학으로 체계화시킨 명저로 알려져 있다.「경제학」이 경제학의 입문교과서라면 「경제분석의 기초」는 경제학을 과학으로 승격시킨 고등교과서인 셈이다. 「가치와 자본」은 케인즈의 「일반이론」과 함께 현대 경제학 이론의 쌍벽을 이루는 명저로서 「한계효용설(限界效用說)」의 창시자 왈라스(Walas, M. E. L.)와 신고전학파 창시자 마샬(Marshall, A.)의 이론을 통합한 「일반균형이론(一般均衡理論)」이 설파돼 있다. 미시경제 입문서인 「미시경제학」은 아마추어가 읽기엔 쫌 딱딱한 내용이었다. 새뮤얼슨은 이들 책을 통해 미국 경제개발의 도화선이 된 성장이론을 성기수에게 체계적으로 학습시키려 했던 모양이었다. 이를테면 성기수의 경제교사를 자임한 셈이었다.

새뮤얼슨과의 대화를 통해 비로소 경제에 눈을 뜬 성기수는 귀국직후 공군사관학교와 서울대에 출강하면서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62~66년)에 줄곧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경제개발 계획은 자유당 정권 때인 58년 산업개발위원회가 만든 경제개발 3개년계획을 보완한 것이었다. 이에 앞서 미국은 한국전쟁 직후 계속해왔던 대한(對韓) 경제지원 정책을 58년부터 무상원조 방식에서 유상원조 방식으로 전환했다. 이 유상원조 계획을 기반으로 해서 당시 이승만 정부가 수립한 정책이 바로 자립 경제개발 계획이었다.

이 계획을 그대로 이어받은 군부(국가재건최고회의)는 막대한 재원 조달을 위해 미국과 일본 등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성기수가 귀국한 63년 7월 말은 새 헌법으로 치르는 대통령선거를 석 달여 앞둔 시기 였다. 그러나 국민 다수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이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그해 12월로 예정된 제3공화국의 출범을 기정사실화 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경제개발 재원 조달을 위해 62년부터 추진된 한일회담(韓日會談)은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추진되고 있었고 세계은행(IBRD)과 아시아개발은행(ADB),국제개발처(AID) 등에서 차관(借款)을 이끌어 내기 위한 각종 외교활동도 이어지고 있었다. 바야흐로 경제논리가 최고의 시대 논리로 부상할 기운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60년대 초, 하버드대학원에서 케네디 정부의 경제 번영 정책을 체험했던 성기수가 「성장이론」의 기반이 된 계량경제학 텍스트들을 읽고 끌렸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밑바닥에서 헤매는 한국의 경제 개발을 위해서도 미국식 「성장이론」을 도입해야 되는 것은 아닐까? 우연의 일치 같지만 성기수의 이 같은 희망은 이미 박정희 대통령의 제3공화국에 의해 서서히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서현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