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제3공화국과 경제개발-KDA 시절 (4)
성기수가 한국경제개발협회(KDA)에서 파트타임 조사역으로 일하게 된 것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에 입소하기 전, 그러니까 65년 가을부터였다. 현역 공군대위 신분으로서 공사교관과 서울대 대학원 등에 출강하던 그에게 KDA 조사역 일은 매우 유익한 경험이었다. 이론으로만 접했던 한국경제 현실을 직접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크나큰 행운이기도 했다. KDA에서 그는 정부의 제2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67∼71년)에 덧붙이게 될 15개년(67∼81년) 중장기 경제개발계획을 계량(計量)하는 작업을 도맡아 했다.
정부가 별도의 15개년 중장기계획이 필요했던 것은 차관(借款)을 제공키로 한 세계은행(IBRD)이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공업화와 고도성장을 기조로 하는 정부의 제2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은 처음부터 차관 없이는 추진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차관 공여의 열쇠를 쥐고 있던 IBRD는 관료들에 의해 작성된 제2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서만으로는 차관을 제공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차관의 상환 가능성을 평가해 보기 위해서는 제4차까지의 중장기 경제개발 계획을 알아봐야겠다는 것이 IBRD의 속셈이었다. 정부는 이같은 IBRD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한 계획서 작성을 KDA에 의뢰해 놓고 있던 중이었다.
지금의 한국개발연구원(KDI)과 같은 전문 국책연구소가 전무하다시피 했던 당시 상황에서 KDA는 15년 중장기 경제개발계획을 계량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관변단체였다. 63년 12월 「자립경제」와 「조국 근대화」를 내걸고 출범한 제3공화국은 정부가 직접 나설 수도 없고 그렇다고 민간에게 맡길 수도 없는 성격의 과업들을 수행하기 위해 관변기구와 국영기업들을 여럿 만들어 냈다. 이들에게는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전직 고위 관료출신 인사들을 포진시켜 힘을 실어줬다. 자유당 정권 때 부흥부 장관(57∼59년)과 재무부 장관(59∼60) 등을 역임했던 송인상을 회장으로 영입한 KDA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영향력이 막강한 편에 속했다. 65년 출범한 KDA는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수립기였던 60년대 중반에서부터 KDI가 출범한 70년대 초반까지 주로 경제, 금융, 조세, 행정 분야 전반에 대한 정부 연구용역을 전담했다.
KDA와 함께 당시 3대 관변기구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곳은 국영기업들인 해외인력개발공사와 한국기술개발공사였다. 해외인력개발공사는 경제개발에 소요될 외화벌이를 위해 서부독일(西獨) 등지에 간호사와 광부(鑛夫)를 파견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고 한국기술개발공사는 도로와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 부문에 대한 정부 용역을 전담했다.(성기수가 한때 컴퓨터교육을 담당하기도 했던 한국기술개발공사에 대한 얘기는 추후에 다시 소개하기로 한다)
새정부의 힘이 실리면서 KDA에는 전도 유망하던 젊은 학자들이 몰려들었고 행정, 경제분야의 싱크탱크 집단으로서 여러가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3공화국 초기 경제개발이나 행정개혁 모델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나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이다. 출범 직후부터 KDA에서 자문역이나 조사역을 지낸 유명인사들로는 당시 서울대 행정대학원장이던 이한빈(李漢彬)을 비롯,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3인방이던 남덕우(南悳祐), 이승윤(李承潤), 김만제(金滿堤) 등이 있다. 특히 서강대 교수 3인방은 이른바 서강학파(西江學派)를 이뤄 많은 후학들을 배출해 내면서 3공화국의 경제개발 정책을 주도했고 나중에는 이한빈과 함께 70∼80년대 국무총리, 경제부총리, 재무부장관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성기수로서는 이곳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경제학자들을 사귈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귀국 직후 큰 관심을 가졌던 계량경제학(計量經濟學)의 실제에 대해서도 직접 경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성기수가 KDA에 나가게 된 것은 고범준(高範俊, 현 한국무역학회 명예회장)의 소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행 부총재(60년)와 재무부차관(64년) 등을 지낸 경제통 고범준은 KDA의 창립에 앞장섰던 창립위원이자, 이사 일을 맡고 있었다. 65년 가을 어느 날 성기수는 친지의 소개로 서울 태평로(太平路)의 남대문 근처(지금의 대한상의 빌딩 부근)에 있는 KDA사무실에서 고범준을 만났다. 이때 고범준은 15년 중장기경제개발 계획을 계량(計量)해낼 전문가를 애타게 찾고 있는 중이었다. 고범준이 찾던 전문가는 수학(數學)에 능통하면서도 경제를 잘 아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시켜야 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상황에서 그런 인물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첫 인터뷰에서 고범준은 긴말이 필요 없다는 듯, 당시 한국은행이 발간한 「산업연관분석(産業聯關分析) 이용방법」이라는 책자를 성기수에게 내밀면서 『수학에 능통하다는 것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고∥. 아무튼 이 책자를 이해할 수 있다면 2∼3일 뒤에 다시 만납시다』라며 잘라 말했다.
산업연관분석은 각국의 중앙은행이 그나라의 경제동향에 대한 상호의존관계를 일람표 형식으로 작성한 산업연관표를 통해 경제 움직임을 규명하는 방법이었다. 한국은행은 우리나라의 산업연관표를 60년부터 작성해 오고 있었다. 산업연관분석법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곧 현대 경제이론들은 웬만큼 이해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귀국한 직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새뮤얼슨교수와의 서신 왕래를 통해 미리 계량경제학을 공부해둔 것은 바로 이럴 경우를 대비한 일이었다. 이틀후 성기수는 고범준과 다시 만났고 그날부터 KDA 조사역으로 일을 하게 됐다.
IBRD에 15개년 중장기경제개발계획서를 제출할 시기가 촉박해지면서 성기수는 몇달 동안을 거의 풀타임으로 KDA에 출근했다. 구체적으로 그가 했던 일은 당시 경제적으로 한국에 앞서 있던 필리핀 등의 발전 모델을 참조해서 한국의 중장기 경제지표를 계량하는 작업이었다. 여기에는 그가 늘 자신 있어 하던 수학을 비롯 최신 경제이론, 통계이론 등 여러 분야의 학문이 복합적으로 요구됐다.
역시 독학으로 공부해둔 운용과학(Operation Research)이론도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2차 대전 때부터 군사작전에 적용되던 OR은 수학과 컴퓨터를 이용해서 가장 적합한 경영분석이나 경제분석(결론)을 얻어내는 이론으로서 당시 국내에서는 매우 생소한 분야임에 틀림없었다. 성기수는 나중에 이한빈의 요청에 의해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OR을 직접 강의하기도 했는데 이는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한국 최초의 OR강의로 알려져 있다.
통계상관표와 산업연관표를 함께 동원하여 11개나 되는 산업분야를 아우르며 15년간의 중장기 경제계획을 계량해내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독립변수가 11개나 되는 11원 연립1차 방정식을 세우고 해(解)를 얻는 과정인 셈이었다. 이같이 복잡한 계획의 계량에는 OR의 한기법인 선형계획법(Linear Programming)을 적용하는 것이 제격이었다. 선형계획법의 선형(Linear)은 원래 기초가 되는 여러 변수들을 1차 방정식으로 세워 극소치 또는 극대치의 해를 구해내는 수학 용어였다. 선형계획법을 경제분석에 적용할 경우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해서 가장 적합하고 유효한 용도에 배분할 수 있는가를 알아내게 돼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뒤부터였다. 11원 연립1차 방정식을 컴퓨터 없이 탁상계산기로만 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진국에서 다원 연립방정식 기반의 선형계획법이 각광받게 된 것은 원래 컴퓨터 기술의 발전이나 보급확대를 전제로 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는 단 한대의 컴퓨터도 보급돼 있지 않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11원 연립1차 방정식을 풀어준 것은 결국 일본의 한 민간 소프트웨어 용역회사였다. 말로만 전해 들었던 일본회사에 직접 편지를 내면서 성기수는 매우 귀중한 결론 하나를 얻었다. 그것은 한국땅에 컴퓨터를 들여오는 것이 경제개발보다 더 급선무라는 사실이었다.
15년 중장기 경제개발계획 계량을 계기로 성기수는 KDA 안팎에서 「수학도사」이면서 「컴퓨터 박사」이자, 「OR전문가」로 통하는 계기가 됐다. 이를 부러워하던 경제학자들과의 친분을 두텁게 하는데도 큰 도움이 됐다. 한번은 남덕우와 김만제가 한 외국인 학자가 선형계획법을 이용해서 작성한 필리핀 경제모델 분석에 관한 논문이 도대체 이해가 안된다며 성기수에게 설명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2∼3시간 가량이 소요될 것으로 생각하고 넉넉하게 시간을 정했던 남덕우와 김만제는 성기수가 단 10분만에 자신들이 원하는 답을 내놓자, 놀라움과 함께 즉석에서 서강대 경제학과 출강을 요청하기도 했다.
KDA에서 일하는 동안 성기수가 얻고 경험한 것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일이 바로 안문석(安文錫, 현 고려대 정책과학대학원장), 이명재(李明宰 현 부산대 교수), 이승윤(李承允, 전 아시아개발은행 이사, 作故) 등 세 사람과의 만남이다. 안문석은 이한빈의 조교였고 같은 대학원생 신분이던 이명재와 이승윤은 KDA의 연구원으로서 조사역 성기수를 보조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67년 성기수가 KIST전산실 설립을 주도할 때 그를 도운 3인방이 된다.
<서현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