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한알의 밀알이 되어 (19)

제4부 제3공화국과 경제개발-KIST 설립 (6)



옛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Korea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의 설립은 65년 5월 18일 백악관 뜰에서 발표된 박정희(朴正熙)대통령과 존슨(Johnson B. Lyndon) 미국 대통령의 공동성명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공동성명 이후 설립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꼭 9개월 만인 66년 2월 KIST는 서울 종로 5가, 지금의 기독교 방송 부근 한 빌딩의 임시 사무실에서 발족됐다.

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 공식방문은 여러 가지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다. 박정권은 제3공화국의 지상과제인 경제개발을 위해 미국 등 외국의 원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고 미국은 5.16 이후 한반도에서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그대로 고수하려는 입장이었다.

이날 공동성명에서 존슨 대통령은 『한국의 공업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종합연구기관의 설립에 대한 한국의 희망을 이해하고 양국 정부가 공동으로 지원할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박 대통령은 『한국의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의 설치 가능성을 한국의 공업계, 과학계, 교육계 지도자들과 더불어 검토하기 위하여 자신의 과학기술고문을 파견하겠다는 존슨 대통령 각하의 제의를 환영한다』라고 화답했다.

이같은 합의에 따라 미국은 65년 7월 대통령 과학기술 담당 특별고문 호오닝(Horning F. Donald)박사를 단장으로 하는 6명의 조사단을 서울에 파견하게 된다. 7월초 내한한 호오닝 조사단은 곧바로 연구소 설립사업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기본사항과 향후 취해야 할 조치사항에 대한 것을 연구, 검토하기 위한 조사활동에 나섰다. 조사단은 같은 해 8월 백악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KIST 설립지침 보고서를 보고했다.

①연구소는 한미 양국정부와 산업계의 재정지원으로 설립한다.

②연구소는 연구 자율성과 인력유치에 필요한 예산상 신축성이 보장되는 비영리 독립기관이어야 한다.

③연구소는 한국산업계와의 유대강화와 새로운 산업활동의 토대를 제공하여야 한다.

④연구소는 향후 다른 개발도상국에 설립될지 모를 비슷한 연구기관의 모형을 제공한다.

⑤연구소가 자리잡기까지 유능한 외국기관의 지원과 장기적 유대가 요망된다.

호오닝 조사단의 이같은 보고서는 즉각 백악관의 호응을 얻어냈다. KIST의 윤곽이 처음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백악관은 이어 KIST설립과 관련된 대통령의 임무와 역할을 확정 발표하였다.

①대통령은 미국 정부와 함께 한국에 응용과학 및 공업기술연구소 설립을 추진한다.

②대통령은 조속한 시일내에 연구소 설립을 위한 책임을 국제개발처(AID)에 부여한다.

③대통령은 AID로 하여금 지정된 공업연구기관과 용역계약을 체결토록 한다.

여기서 「유능한 연구기관」 또는 「AID로 하여금 지정된 공업연구기관」이 바로 미국의 바텔(Battelle)기념연구소이다. 이 연구소는 KIST 설립을 전후하여 한국 정부와 과학기술계에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곳이다. 지난 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현역 공군대위이자 공사교관이던 성기수가 KIST 임시연구원으로 위촉된 것도 바텔기념연구소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바텔기념연구소는 미국 정부를 대신한 AID와 용역계약을 체결하고 KIST 설립과 초창기 연구소 운영에 깊숙히 관여를 하게 되는데 이 연구소가 한국에서 처음 한 일은 「KIST 설립 및 조직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한국정부와 산업계, 과학기술계, 교육계의 지도적 인사들의 의견을 참조해서 작성한 이 보고서는 65년 12월, 한미 양국 정부에 제출돼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66년 초 연구소 설립과 지원에 관한 한미 협정서와 연구소 설립 정관도 이 보고서를 토대로 기초된 것이었다.

원래 한국정부가 KIST와 같은 형태의 종합연구소 설립을 구상한 것은 한미 정상회담 1년 전인 64년부터였다. 경제개발계획의 주무부처인 경제기획원은 당시 상공부 산하의 금속연료종합연구소를 국책 종합연구기관으로 육성하려는 방안을 청와대에 건의해 놓고 있었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62∼67년)의 기조는 산업구조개선과 산업근대화를 통한 「자립경제 달성을 위한 기반구축」, 즉 한마디로 공업화였다. 그러나 기술축적이 전무한 당시 산업계 현실에서 이를 뒤받침할 기술을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관건이었다.

63년 당시 한국에는 80개에 이르는 과학기술연구기관이 있었으나 실질적인 연구활동도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큰 원인은 연구활동에 대한 동기부여가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이 국공립인 이들 연구기관은 예산의 절대다수를 정부예산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일반관서와 똑같은 선상에서 각종 법령, 규정, 관행에 적용 받고 있었다. 따라서 연구소 자체의 의지에 따른 자율적 연구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64년 경제기획원 차관이던 김학렬(金鶴烈)이 기술관리국장 전상근(全相根, 과기처 종합기획실장 역임)을 통해 추진하던 계획이 바로 종합연구소 설립방안이었다. 김학렬은 현황을 파악해본 결과 기존 연구소의 재정비에 의한 기술능력의 확보는 불가능하며 우수한 연구인력을 갖춘 새로운 연구기관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박사급 연구원 13명을 보유하고 있던 재단법인 금속연료종합연구소를 모체로 종합연구소를 육성하려는 계획은 그 대안 가운데 하나였다.

이에 앞서 상공부 산하 국립공업연구소를 재단법인 형태의 종합연구소로 개편하는 안, 국립공업연구소, 원자력연구소, 금속재료종합연구소를 통합하는 안 등이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점이 야기될 소지가 많았다. 김학렬의 의지가 담긴 금속재료종합연구소 개편안은 곧 청와대에 보고돼 구체안이 검토되는 등 상당한 진전을 보았으나 박 대통령의 미국 공식방문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됐던 것이다.

공동성명 이후 빨라진 백악관의 움직임과 함께 한국 정부도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을 축으로 과학기술연구소 설치방안을 마련하고 공청회를 거쳐 65년 7월22일 최종안을 청와대에 보고했다. 이 안의 골자는 산업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술의 제공 및 연구수행 등 연구소의 설립목적과 재외 한국인 과학자를 유치해서 적극 지원하겠다는 인력확보 방안 등 크게 두가지였다.

이날 청와대는 또 경제기획원이 구성을 요청한 연구소 설립 자문위원회도 재가했다. 문교부장관을 역임했고 경제과학심의위 상임위원이던 최규남(崔奎南)을 위원장으로 하는 자문위원회 명단에는 한양대 대학원장 성좌경(成佐慶), 경제기획원 기획차관보 장예준(張禮準), 상공부 광공업차관보 이우용(李宇容), 원자력연구소장 최형섭(崔亨燮), 연세대 이공대학장 한만춘(韓萬春),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소장 한상준(韓相俊),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송대순(宋大淳), 서울대 공대학장 이량(李亮) 등 당시 관계, 경제계, 과학계를 대표하던 중견인물들이 망라돼 있어 그 비중을 짐작케 하고 있다.

한편 바텔기념연구소의 「KIST설립 및 조직에 관한 보고서」에 근거한 한미협정서에는 앞서 호오닝 특별고문이 주문한 대로 KIST의 형태를 자율성이 확보된 비영리기관으로 한다는 것 외에도 『연구소 직원은 한국에서 가장 유능한 과학기술자들로 충원되며 급여수준과 기타수당은 재외 인재를 포함하여 우수한 국내 과학기술자를 유치할 수 있는 정도로 책정할 것』등 연구원 대우문제에 대해 비교적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어 흥미롭다.

최대 관건인 연구의 자율성과 최고의 보수를 보장한다는 KIST의 이같은 방침은 당시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능한 젊은 과학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고 특히 성기수와 같은 소신있는 유학파들에겐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KIST 설립 첫 해 채용규모는 임직원을 포함 40명 선이었다. 하지만 협정서에는 KIST가 5년 이내에 2백10명의 직원과 20만 평방 피트(약 5천5백평)의 적절한 장비가 갖춰진 연구실 및 사무실이 요구될 것으로 적시하고 있었다.

66년부터 71년까지 5년간은 KIST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시기로 간주되고 있다. 갖 부화한 병아리나 다름없었던 KIST 입장에서 보면 이 시기는 종합연구소로서의 자생력을 확보할 수 있느냐의 여부를 판가름할 분수령인 셈이었다. 분수령에서 방향을 잡아준 역할을 한 곳이 바텔기념연구소였다. 출범 후 4개월째 되던 66년 6월 KIST는 그동안 일방적으로 지시만 받던 바텔기념연구소 측과 정식으로 기술용역계약을 맺고 여러가지 구체적 지원방안을 논의할 수 있는 자매연구기관으로서 공식적인 관계를 설정하게 된다.

계약후 바텔기념연구소는 66년 11월부터 10개월 동안 17개 분야에 걸친 산업실태 조사를 실시했다. 여기에는 미국에서 파견된 전문가 23명과 바텔이 직접 산업계, 학계, 정부기관에서 선발한 57명의 한국인 전문가가 함께 참가했다. 지난 호에서 언급한 대로 성기수는 67년 봄 바텔기념연구소 컴퓨터기술고문 에반스(Evans, Donald)에 의해 연구원으로 추천돼 6개월 동안 국내 전산분야를 연구 조사하는 행운을 얻게 됐던 것이다.

<서현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