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통끝에 발표된 퇴출 대기업의 명단은 일견 실속이 없는 것으로 보여진다.
우선 5대 그룹 계열 전자관련 8개사의 면면을 보면 LG전자부품, 삼성시계 등 굵직한 기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소규모의 비상장회사로 일반인들로서는 이런 회사도 있었나하는 반응을 보일 기업이 적지 않다. 삼성의 한일전선, 이천전기, 대우의 한국산업전자, 오리온전기부품, LG의 LG오웬스코닝, SK의 케이블TV 교육채널인 마이TV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기업은 대부분 자본금 1백억원, 매출 1천억원 내외의 소규모 기업들이며 특히 재벌들이 본래부터 정리계획을 갖고 있던 것이 대다수다. 5대 그룹 계열사를 제외한 나머지 전자관련 퇴출기업도 이미 부도상태이거나 사실상 퇴출을 눈앞에 둔 경우가 상당수다.
부도 7개월째인 해태전자가 대표적인 경우다. 해태전자는 지난달 10개 종금사들로부터 1천1백억원의 부채를 전환사채(CB)로 바꾸는 데 동의를 얻어냈고 조흥은행 등 은행권과도 1천억원의 출자전환을 놓고 협상을 벌여왔다. 이 때문에 이번 퇴출작업으로 한국 경제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는 대기업의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여론이 강하게 일고 있다.
실제로 이들 퇴출기업의 상당수는 그룹들이 오래전부터 스스로 퇴출시키고 싶어했으나 그룹의 「명예」를 감안, 실행하지 못했거나 구태여 금융권이 개입하지 않더라도 자연 「사망」할 것으로 분류된 기업들로 평가됐다.
따라서 업계 일각에서는 이번 퇴출을 부실기업 구조조정의 「구색 맞추기」로 평가절하하고 있기까지 하다. 한화그룹의 유, 무선 전화기 제조업체인 오트론이 퇴출 대상기업에 포함된 데 대해 한화그룹이 『예상했던 일이며 나름대로 대비책을 준비중이지만 확정된 것은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반영한다. 오트론의 경우 연간 매출액 3백34억원에 부채가 1천43억원에 달할 정도로 재무구조가 취약하다. 이에 대해 모그룹의 한 관계자는 『구색맞추기라는 것은 지나친 폄하』라면서도 『현실적으로 규모가 큰 기업들은 어느 정도 부실이라 하더라도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할 때 당장 퇴출시킬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나 산업관계 전문가들은 5대 그룹의 경우 기업 규모에도 불구하고 내부거래에 의해 연명하거나 몇 년째 적자를 계속하고 있는 기업들이 이들 퇴출대상 외에 상당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에 퇴출대상으로 선정된 5대 그룹 계열사 명단은 5대 그룹의 부실계열사 구조조정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중소기업에나 맞는 업종에 굴지의 그룹들이 그동안 얼마나 문어발식으로 참여하고 있었나를 다시한번 확인시켜주고 있다.
물론 유망기업이 퇴출기업으로 판정난 경우도 있다. 대우의 한국산업전자가 대표적인 예다. 이 회사는 국내 공작기계 10개사가 합작으로 설립한 회사로 지난해 매출이 2백8억원이지만 일본 화낙사에 경쟁력이 뒤져 고전해왔다. 종업원 수가 4백명에 육박하는 신호전자통신의 경우 지난해 매출이 1천30여억원에 달할 정도로 나름대로 비중이 있는 회사다. 효성그룹의 효성원넘버는 전화나 삐삐 등을 하나의 번호로 사용할 수 있는 부가통신서비스업체로 지난 96년 설립됐으며 매출액이 2억8천만원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사업성이 높은 촉망받는 기업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정리방법이다. LG전자부품의 경우 적자사업 부문이나 사업성이 떨어지는 부문을 정리한 뒤에 매각하고 LG오웬스코닝은 합작회사인 일본의 아사히글라스 및 미국의 오웬스코닝 등에 지분매각을 추진하는 방안이 유력하다.
LG그룹은 퇴출대상 기업을 정리하면서 종업원들에 대한 정리해고는 실시하지 않고 대신 희망퇴직이나 재배치 등을 통해 최대한 구제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정리과정에서 회사를 떠나야 하는 직원들이 적지 않아 종업원 처리문제에 난항이 예상된다.
삼성그룹도 퇴출대상 기업 가운데 삼성시계, 한일전선, 이천전기 등 3개 기업은 매각방식으로 처리될 가능성이 클 것으로 내다봤다. 이들 그룹은 『구체적인 처리방안은 은행과 협의해 추진해 나가겠지만 종업원들의 고용문제 해결이 가장 어려울 것』이라며 『그룹으로서도 나름대로 노력할 생각이나 돈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어서 정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구근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