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 대망의 70년대-예산업무 EDPS화 (3)
70년대 어느 명문대학 학보사가 신입생 수습기자를 뽑는 시험문제에 「EDPS」를 기술하라는 문제를 출제했는데 적지 않은 응시생들이 음(E), 담(D), 패(P), 설(S)의 이니셜이라고 답했다는 얘기가 있다. 컴퓨터가 매우 희귀했던 70년대 학생이나 식자층에서 가장 널리 유행했던 은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EDPS였다.
EDPS(Electronic Data Processing System)라는 용어는 지금은 별로 쓰이지 않지만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이 말은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됐다. 하나는 대학 전산학과 교양과목이었던 「EDPS개론」에서처럼 컴퓨터 개념 전반을 지칭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컴퓨터에 의한 경영관리나 업무 즉, 전산화(電算化)라는 뜻으로 통했다.
그러고 보면 은어로서 EDPS를 처음 사용했던 사람들은 초창기 극소수의 컴퓨터 전문가들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해 진다. 흔치 않은 전문용어가 이처럼 전혀 뜻이 다른 유행 조어(造語)로 전락해 버린 것은 당시 컴퓨터나 전산화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높았지만 지식수준은 매우 일천했음을 의미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EDPS는 70년대 초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전산실 연구원들 사이에서 최고의 화두(話頭)였다. 따지고 보면 KIST전산실의 발족목적 자체가 정부기관과 기업 및 사회 제반시설의 전산화였다. 「CDC3300」 컴퓨터가 도입된 직후인 69년 말부터 75년 말까지 전산실 책임자로서 성기수는 모두 1백9건의 연구프로젝트를 수행했는데 이 가운데 70건의 프로젝트 제목에 EDPS라는 말이 들어 있다. 이를테면 「EDPS 한글화에 관한 연구」 「전매행정의 EDPS화를 위한 연구」 「전화요금 계산업무 EDPS 개발 및 운영」과 같은 식이었다.
KIST전산실이 수행한 최초의 정부 용역은 경제기획원의 「예산업무 EDPS화에 관한 연구」였다. 예산업무 EDPS화는 관료들의 컴퓨터 마인드 확산에 큰 도움이 됐고 정보산업사적인 측면에서도 여러 가지 의미를 남겼다. 무엇보다도 이 프로젝트는 KIST전산실의 성가를 대외에 알려 전산실의 확대발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KIST전산실이 예산업무 EDPS화 프로젝트를 맡게 된 것은 예산총괄과장 강경식(姜慶植, 국회의원)의 요청이 계기가 됐다. 60년 고시 행정과를 합격하고 63년 미국 시러큐스 대학에서 행정학 석사를 취득한 강경식은 64년부터 경제기획원 예산과(67년 국으로 승격)에서 본격적인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예산업무가 매우 불합리하며 불투명하게 이뤄지는 것을 보아 왔던 강경식은 69년 예산총괄과장으로 승진하자 곧바로 직속상관인 예산국장 김주남(金周南, 건설부 장관 역임)을 통해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 김학렬(金鶴烈, 72년 작고)에게 예산업무의 EDPS화를 건의했다. 당시로서는 고정화된 업무패턴을 깨는 파격적인 건의였다.
70년 3월 김학렬의 승인이 떨어지자 강경식은 이를 성기수에게 알렸고 KIST전산실은 곧바로 연구작업에 착수했다. 이로부터 20여 일이 지난 4월7일 성기수는 강경식의 추천과 김학렬의 요청에 의해 경제기획원에서 열렸던 경제동향 브리핑에서 예산업무 EDPS화를 정식으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강경식을 상대했던 KIST전산실 측 실무책임자는 안문석(安文錫, 고려대 정책대학원장)이었다. 프로젝트 총책임자였던 성기수가 안문석에게 실무팀장을 맡긴 것은 행정학을 전공한 데다 65년 한국경제개발협회(KDA)의 조세개혁팀 소속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던 경험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예산업무 EDPS화는 70년 3월부터 72년 말까지 제1단계, 73년초에서 74년 말까지의 제2단계, 77년의 제3단계 등 햇수로는 6년에 걸쳐 3단계로 나눠 진행됐다.
제1단계의 백미는 70년에 6월에 개통된 홍릉(KIST전산실)과 광화문(경제기획원) 사이의 데이터통신망 개설이었다. 데이터통신망이라 해보았자 KIST전산실의 「CDC 3300」컴퓨터와 경제기획원 예산국에 설치해 놓은 「CDC 200UT」 더미터미널을 3백bps급 모뎀으로 연결시키는 것에 불과했지만 당시로서는 대사건이었다. 그 타당성 조사를 실시했던 IBM조차도 여러 가지 기술적인 어려움과 통신회선상의 제약 때문에 연결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터였다. 어쨌든 전산실 안의 호스트컴퓨터와 전산실 밖의 터미널이 모뎀으로 연결된 것은 홍릉-광화문 라인이 국내 최초였다.
두 지점 간의 데이터통신은 KIST전산실의 「CDC 3300」에서 처리한 예산업무를 경제기획원에서 직접 받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산국에 설치된 더미 터미널은 분당 3백장을 읽을 수 있는 카드판독기(card reader)와 분당 3백 줄(line)을 인쇄할 수 있는 라인프린터, 디스플레이 콘솔(console)장치 등으로 구성돼 있어 업무의 배치(batch)처리가 가능했다..
홍릉-광화문 라인 개통 후 본격적인 예산업무 관련 프로그램의 개발과 운영이 시작됐다. 71년에는 각 부처에서 올라온 예산요구서로부터 예산사정에 필요한 각종 정책자료를 도출해낼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개발됐다. 72년에는 각 예산사정 단계마다 예산당국이 필요로 하는 정책자료를 즉시 검색 출력해주는 프로그램의 개발이 완료됐다.
73년부터 시작된 제2단계는 국회 의결을 거친 예산의 집행과 관련된 업무분야를 집중적으로 전산화하는 작업이 주를 이뤘다. 이 과정에서 예산 배정에 필요한 자료분석, 각 부처에 대한 분기별 예산배정서 작성, 결산업무 등을 처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개발됐다. 1, 2단계 프로젝트에서 안문석팀에서 함께 일했던 이들로는 김봉일(金鳳一, 전 한국통신 소프트웨어연구소장), 김정선(金正善, 한국항공대 교수) 등이 있다.
77년의 제3단계는 당시 시행 직전에 있던 통합예산제도 자체를 전산화하는 업무가 핵심이었다. 이에 앞서 76년 예산국장으로 승진해 있던 강경식은 평소 자신이 계획해 왔던 통합예산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다. 통합예산제도는 공공부문의 재정 상태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는 예산시스템이었다. 이 제도가 도입되기 전까지 우리 나라에서는 공공부문의 예산규모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따라서 그만큼의 예산낭비가 불가피한 지경이었다. 강경식의 요청으로 KIST전산실은 한국개발원(KDI), 한국은행, 세계은행(IBRD) 등 각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 제도의 입안과정에서부터 참여, 새 제도를 전산화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제3단계 프로젝트 역시 안문석이 실무책임자였고 신동필(申東弼, 92년 SERI소장 역임) 등이 연구원으로 참여했다.
오랜 기간을 두고 완성된 예산업무 EDPS화는 사실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엘리트 관료 강경식의 의욕과 집념으로부터 시작된 프로젝트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에 대한 의욕과 집념에서는 강경식 이상이었던 성기수가 아니었다면 이 프로젝트의 결실은 최소한 80년대 이후로 넘겨질 뻔한 일이었다.
성기수에게 예산업무 EDPS화 개발은 일종의 테스트베드 성격의 프로젝트였다. 자체 컴퓨터 도입비용 충당이 부담스러웠던 당시 정부기관과 기업의 상황을 감안할 때 KIST전산실의 컴퓨팅파워를 이용하는 데이터통신 방식의 전산화는 가장 적절한 대안이었다. 그런 점에서 예산업무 EDPS화 개발은 KIST전산실은 물론, 정보산업 전체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었던 최초의 프로젝트였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홍릉-광화문 라인의 데이터통신 방식은 이후 중앙관상대(70년 11월), 체신부, 농림부 양정국(이상 70년 12월), 전매청(71년 7월), 관세청(71년10월) 등의 전산화와 국내 처음으로 「주판알 없는 상업학교 교육」을 표방했던 덕수상고(71년 12월) 등의 원격지 온라인 컴퓨터교육에도 그대로 재현됐다.
한편 예산업무의 EDPS화는 관료들의 컴퓨터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예산국장 김주남은 갖은 협박과 회유(?)를 통해 직원들을 하루 한 시간씩 일찍 출근케 하여 컴퓨터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프로젝트 등으로 성기수를 여러 번 접촉했던 부총리 김학렬은 자신의 컴퓨터 지식을 과시할 겸해서 경제장관 간담회 등에서 그 특유의 입담으로 『컴퓨터 공부 좀 하세요』라며 장관들을 자극하곤 했다. 실제로 70년대 초 이를 계기로 장관, 산하 단체장, 공기업 사장 등 고위관료들의 KIST전산실 방문이 잇따랐고 그 때마다 교육은 성기수가 담당했다.
한번은 어느 토요일 김학렬을 비롯, 재무부 장관 남덕우(南悳祐), 과기처 장관 김기형(金基衡), 상공부 장관 이낙선(李洛善), 체신부 장관 김보현(金甫炫) 등 10여명의 장관들이 우르르 성기수를 찾은 적도 있었다. 이날 피치 못할 사정으로 교육에 불참했던 건설부 장관 이한림(李翰林)이 일요일인 다음날 성기수에게 별도의 보강(補講)을 요청했던 일은 당시 장관들의 컴퓨터교육 열기가 어느 정도였던가를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이 일이 있은 후 성기수는 일요일을 마다 않고 고위관료들에 대한 컴퓨터 교육에 적극 나섰는데 이같은 노력은 결국 체신부 전화요금고지서 전산화와 전매청 업무전산화 등 한국의 경제발전과 정보산업 역사에 길이 남을 주요 프로젝트들이 KIST전산실에 의해 수행되는 계기가 됐다.
<서현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