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민방, 케이블TV 특수 등으로 한동안 달아올랐던 국내 방송장비시장이 국제통화기금(IMF)사태 이후 급랭됐다.
케이블TV 프로그램공급업체(PP)의 경우 경영난으로 현재 GTV, 다솜방송 등 현재 5개 PP가 부도를 냈으며 그간 무풍지대로 여겨졌던 종합유선방송국(SO)조차도 부도를 맞고 있는 등 케이블TV업계의 지난 3년간 누적적자가 무려 1조8천억원에 이른다. 신규 장비 구매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방송장비의 주된 수요처인 지상파방송 역시 올해는 구조조정의 여파로 구매계획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어 국내 방송장비업체들의 부진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위성방송사업 개시 때 최소 5백억원 정도의 방송장비를 구매할 예정이었던 DSM조차 새 통합방송법 개정작업의 지연으로 아직까지 구매에 나설 입장이 아니어서 그나마 IMF한파속 특수를 기대했던 방송장비 공급업체들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주요 장비공급업체들의 올 상반기 매출실적을 보면 국내 방송장비시장이 IMF사태 이후 얼마나 극심한 부진에 시달리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업체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략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최고 80% 가량 매출이 감소했다. 특히 방송장비의 대부분이 수입제품이어서 환율인상분까지 따질 경우 주요 공급업체들의 상반기 매출은 전년동기의 10%선에 머무른 것으로 분석된다. 작년 상반기에 10대의 장비를 팔았다면 올 상반기에는 고작 1대만 판 셈이다.
국내 비선형편집기시장의 선두주자인 한국아비드는 상반기 매출실적이 5억원 정도로 작년 같은기간의 30억원에 비해 80%가량 줄었고, 일본 소니사의 방송장비를 국내에 들여오고 있는 동유무역도 상반기 매출이 30억원으로 전년 동기의 1백50억원에 비해 역시 같은 비율로 감소했다.
또한 미국 방송장비업체 텍트로닉스사의 한국법인인 한국텍트로닉스도 상반기 매출이 40억원으로 작년 같은기간의 65억원에 비해 40% 정도 떨어졌으며 영국 콴텔사의 국내 법인인 콴텔코리아 역시 상반기 12억원에 그쳐 작년 동기의 80억원에 비해 80% 이상 매출이 뚝 떨어졌다.
이밖에 미국 사이텍스의 비선형편집기 등을 국내에 공급하고 있는 세통상사는 달러 기준으로 상반기 50만달러의 매출에 그쳐 연말까지 총 4백만달러의 매출목표를 달성하더라도 지난해 매출 7백만달러에 비해 40% 가량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네덜란드 필립스 디지털비디오시스템(DVS)사와 디스트리뷰터 계약을 맺은 삼아전자도 상반기 매출실적이 2억원으로 작년 같은기간의 6억원에 비해 70% 가량 줄어들었다.
『지난 20년동안 이 사업을 해왔지만 올해처럼 사업이 안된 적은 없었습니다. 사업을 계속하자니 적자가 쌓이고 그만두자니 달리 할 사업도 없는 실정이어서 앞으로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랜기간 이 분야에서 몸담아온 한 업계 관계자의 자조섞인 표현이 설득력을 더해가고 있다.
이처럼 국내 방송장비시장이 급격히 냉각됨에 따라 이들 업체는 인력축소 등 대대적인 구조조정 작업을 활발히 펼치고 있으며 대리점을 신규로 확충하고 가격을 내린 신모델을 잇따라 선보이는 등 새로운 마케팅 전략으로 「불황 헤어나기」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우선 그간 천정부지로 치솟기만 하던 방송장비 공급가격이 환율인상에도 불구하고 내려가고 있다. 실제로 비디오서버의 경우 방송장비 공급업체들이 내수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서버공급가를 작년 말 대비 대략 30% 가량 인하하고 수요창출에 적극 가세하고 있다.
비디오서버인 「프로파일」을 국내에 공급하고 있는 한국텍트로닉스는 최근 36GB급인 「PDR202D」의 공급가를 2만달러 내린 7만달러로, 16.8GB급 「PDR100」도 2만달러를 낮춘 6만1천달러에 각각 공급키로 결정했으며 「미디어 스트림」 비디오서버를 공급하고 있는 한국HP는 최근 9GB급 비디오서버(모델명 E2524B)의 공급가를 종전보다 4만달러 가량 내린 7만달러에 공급키로 한 데 이어 이달부터 공급에 나선 18GB급 제품(모델명 E2524C)도 사실상 가격을 내린 10만달러선에서 공급키로 했다. 이밖에 네덜란드 필립스 DVS사의 국내 디스트리뷰터인 삼아전자는 36GB급 「미디어풀」의 공급가를 종전 13만달러에서 10만달러로 3만달러 가량 낮췄으며, 일본 소니사의 방송장비를 국내에 들여오고 있는 동유무역도 주력 모델인 64GB급 「마브70」의 공급가를 사실상 내린 5만3천달러에 공급키로 하는 등 비디오서버업계에 공급가 인하 움직임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업계의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IMF한파를 뛰어넘기에는 중과부적이다. 지상파방송 등 주요 수요처들이 아직까지도 장비 구매 계획을 세우지 않은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장비공급사들은 고가제품 대신 중, 저가제품으로 새로운 시장돌파구를 마련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중, 저가 비선형편집기시장을 본격 공략하고 있는 유윈정보시스템, 씨너지코리아, DVI 등 장비공급사들은 학교 영상관련학과와 소규모 프로덕션, 웨딩숍 등에서의 신규 수요에 힙입어 매출의 상당부분을 이 분야에서 올리고 있다.
중, 저가 문자발생기도 효자노릇을 하고 있다. 컴픽스, FA전자, 보은전자통신 등 문자발생기업체들이 전략적으로 출시한 중, 저가 제품들이 소비자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줄곧 중저가 문발기시장만을 공략해 온 FA전자는 주력 제품(모델명 아비스5000)이 상반기에만 3백대, 4억원정도의 매출을 올려 작년 같은기간 대비 50% 정도 수준에 육박했으며 컴픽스 역시 작년 10월 출시한 중저가제품(모델명 윈1000)을 상반기 중 1백50대 가량 판매해 2억5천만원 정도의 매출을 올렸다. 또한 보은전자통신은 지난 5월께 출시한 보급형 제품(모델명 BCG1000)이 출시되자마자 판매호조를 보여 초기 물량 1백대가 거의 팔려나감에 따라 하반기 중 2백대 정도를 추가로 공급할 예정이다. 이 회사는 연말까지 총 3백대 정도를 판매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4억원 이상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도 외국 유수의 방송장비사들이 국내시장을 겨냥, 잇따라 둥지를 트는 등 시장 공략을 본격화하고 있어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이들 업체는 우리나라의 IMF한파를 오히려 장기적인 관점에서 국내시장 진출을 위한 디딤돌로 삼기에 충분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의 방송장비 전문업체인 미디어100사가 지난 6월께 독립법인인 「미디어100코리아」를 설립했고, 고일상사 등과 방송용 모니터 공급계약을 맺고 있는 벨기에의 바코사 역시 지난 4월께 별도법인인 「바코코리아」를 설립하고 케이블TV용 변조기 등 방송장비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또한 미국 문자발생기 전문업체인 카이론사도 국내시장 진출을 위해 지난 5월 한국종합전시장(COEX)에서 열린 국제방송장비전시회 「KOBA」행사를 전후해 시온미디어, 산암텍 등 국내 방송장비사들과 물밑협상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결과가 주목된다.
비록 단기간이지만 국내 방송장비산업이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서는 등 예상치 않았던 기록을 낳고 있는 것도 IMF한파가 가져다주는 또 다른 양상이다. 독립 프로덕션 등의 잇따른 부도와 지상파방송사들의 구조조정 등으로 넘쳐나는 중고 방송장비의 수출이 한동안 활기를 띠었던 것은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만하다. 주로 방송장비 렌털전문업체인 에이스전자, 선우영상, 진안전자 등이 미국 어프로팔사, 브로드캐스트스토어(BCS)사 등에 ENG카메라와 방송편집기 등을 수출, 짭짤한 외화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최근 달러 약세가 지속되고 영상업계의 구조조정 작업이 일단락 돼 매물이 나오지 않아 현재는 수출이 부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내 제조사들이 해외시장 공략을 본격화하고 있는 것도 IMF시대 이후 새롭게 변모된 점으로 꼽을 수 있다. 단순히 내수부진을 탈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볼 수도 있으나 「수출이 아니고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위기의식이 업계내 팽배해져 「수성」에서 「공략」으로 정략을 바꾼 것이다. 동서전자, 씨아에스테크놀로지, 아이큐브, 컴픽스, FA전자 등 국내 내로라하는 방송장비업체들은 해외 유수의 방송장비전시회에 잇따라 참여하거나 지사를 설립하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해외시장 개척에 앞다퉈 나서고 있다.
특히 동서전자가 최근 문을 연 홍콩 첵랍콕신공항에 7만4천달러 상당의 방송장비를 국내 처음으로 수출한 것을 계기로 국내 방송장비업체들의 해외진출 분위기가 크게 고조되고 있어 앞으로 적지 않은 성과가 기대되고 있다.
방송장비 전문업체인 씨아이에스테크놀로지는 순수 독자기술로 개발한 보도정보시스템(NIS)을, 아이큐브는 「아이다 뉴스룸」을, 월드정보통신은 오디오믹서와 방송주변장비 등을 태국, 중국 등에 판매하기 위해 현재 해당 국가의 바이어들과 물밑접촉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또한 고려전자엔지니어링 역시 디지털 분배기 및 오디오믹서 등을 유럽과 미국지역으로 수출하기 위해 해당지역 품질인증규격인 「CE」 「UL」마크 인증을 신청해 놓고 있으며 해외 영업인력도 보강했다.
컴픽스, FA전자, 디지털퓨전 등 문자발생기업체들의 해외시장 개척 움직임도 활발하다. 지난 4월 미국에서 열린 국제방송장비전 「NAB」 행사에 참여한 컴픽스는 로스젤레스 소재 지사인 「컴픽스미디어」를 통해 디지털 문자발생기의 수출을 본격화하는 동시에 영국, 프랑스 등 유럽시장도 공략, 올해 이 분야에서 모두 1백만달러의 수출실적을 거둘 계획이다. FA전자는 오는 9월께 독일 「포토카나쇼」를 염두에 두고 수출전략 모델인 「아비스7000」모델 3종을 잇달아 개발, 유럽지역 공략에 나설 예정이다. 또한 윈도NT를 지원하는 문자발생기를 국내 첫 개발한 디지털퓨전도 미국 등지로의 수출을 본격화하기로 하는 등 국내 방송장비업체들의 해외진출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국내 방송장비시장은 방송사들의 입지여부를 떠나 이제 디지털 환경으로 주력시장이 옮겨가고 있는 추세다. 당장은 국내 방송사들의 자금여력이 없어 디지털화로의 급속한 진행은 어려울 것으로 보이나 2002년 월드컵축구 등에 대비한 디지털방송 환경구축이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어 내년께에는 어느 정도 시장이 회복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특히 현재 추진되고 있는 통합방송법 제정작업이 연내에 마무리될 경우 위성방송 등 새로운 멀티미디어 서비스가 속속 등장할 것으로 보여 국내 방송장비시장이 「IMF한파」에 이은 「제2의 부흥기」를 맞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김위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