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전자산업이 안고 있는 구조적인 모순 가운데 하나가 원천기술의 부족이다. 더욱이 최근 불어닥친 IMF 한파로 국내 전자산업 전체가 본격적인 구조조정기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인프라스트럭처(하부구조)에 대한 각계의 관심이 한층 고조되고 있다.
세트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부품산업의 육성이 필수적이고 이에 따라 부품 제조기술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부품 제조장비 산업을 이제부터라도 전략적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부품산업의 인프라스트럭처마저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부품산업의 질적 성장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핵심장비 대부분을 경쟁국으로부터 수입, 사용하고 있는 국내 부품업체들은 이미 장비를 발주하는 단계에서부터 사업 내용과 추진단계를 외국 경쟁업체에 그대로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국내 업체들이 생산단계에 접어들기도 전에 경쟁국이 먼저 양산에 나서는 등 선수를 빼앗기는 사례도 많았다.
장비산업의 중요성에 대해 한국반도체산업협회 김치락 부회장은 『장비 제조기술은 관련산업에 대한 파급효과가 크다. 우선 장비산업이 견실하면 전방산업인 부품분야는 물론이고 조립·세트 등 전자산업 전반에 연쇄적인 경쟁력 회복으로 이어진다. 또한 장비시장이 확대되면 여기에 채용되는 관련 부품시장의 확대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같은 명분 외에도 장비산업은 자체적으로 시장전망이 매우 밝으며 경우에 따라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유망산업이기도 하다.
이는 인건비 상승과 제조업체의 구인난이 심화될수록 자연히 부품업체들의 자동화와 시설투자가 지속적으로 추진돼 부품장비 시장은 계속 커질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장비산업은 또 일반 산업용 기계와는 달리 주문제작형 산업으로서 부가가치가 매우 높다. 더욱이 최근 전자부품 산업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대만·말레이시아·싱가포르 등의 동남아지역과 중국시장은 국산 부품 제조장비의 유망 수출 대상 지역이 될 가능성도 크다. 사정은 약간씩 다르지만 이미 일부 반도체장비 업체들의 성공사례가 이를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메모리 신화」로 대변되는 반도체장비 부문의 경우 최근 국내 설비투자 감소로 다소 위축되기는 했지만 미래산업·DI·케이씨텍 등 4, 5개 업체가 국산 장비의 개발로 한해 몇백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더욱이 그동안 조립 및 유틸리티 장비가 주류를 이루던 국내 반도체장비 산업은 최근 화학증착(CVD) 및 에처장비와 트랙 등과 같은 각종 전공정용 핵심 장비들이 국내 업체들에 의해 개발되기 시작하며 한 단계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따라 저압화학증착장비(LPCVD) 개발업체인 주성엔지니어링은 지난해 9백만달러어치의 직수출 물량을 포함, 총 3백5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으며, 트랙장비 개발업체인 실리콘테크와 에처장비 생산업체인 청송시스템은 회사설립 2∼3년 만에 수백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이 분야 중견업체로 성장했다.
이는 전공정장비의 제품가격이 최하 1백만달러에서 최고 7백만달러에 이르는 고가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첨단부품 제조장비들이 얼마나 고부가가치 품목인지를 입증해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공정장비 분야에 대한 국내 업체들의 기술수준은 아직 선진 외국에 비해 매우 취약하다.
실제로 최근 한국기계연구원이 발표한 반도체장비 관련기술 평가자료에 따르면, 미국 및 일본 등 선진국의 반도체장비 제조기술을 10으로 볼 때 후공정 및 유틸리티 장비부문의 국내 기술은 각각 7과 6을 기록, 어느 정도 경쟁이 되는 데 반해, 전공정부문 기반기술은 불과 4에 머물렀다. 이에 따라 지난해 국내 전체 반도체장비 수요 중 국산 제품이 차지한 비율은 20%에도 못미치는 18.2% 수준에 머물렀다.
그나마 반도체장비 산업은 국내 소자업체들의 측면지원에 힘입어 나름대로의 기술발전은 이루어가는 모습이지만, LCD 및 일반 부품분야의 장비산업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제2의 반도체산업」으로 간주되는 LCD분야의 경우 향후 안정적인 생산수율과 제품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LCD장비의 국산화를 반드시 넘어야 할 필수조건으로 보고 그 어느때보다 연구개발에 힘을 쏟고 있지만 아직도 장비 국산화 수준은 걸음마 단계다.
일반부품을 대표하는 PCB의 경우만 해도 웨트장비·노광기·라미네이팅기·스크린인쇄기 등과 같은 비교적 범용장비를 제외하고는 CNC드릴·핫레스·도금·검사장비 등 고가의 핵심 장비 대부분이 외국에서 수입된다.
대표적인 회로부품인 저항기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세라믹로드에 탄소나 금속피막을 입히는 착막기를 비롯, 캡소팅기·커팅기·웰딩기·도장기 등 주요 장비들이 주로 대만에서 수입되고 있다.
콘덴서의 경우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이지만 필름분야가 아닌 적층세라믹콘덴서(MLCC) 등 칩타입 부문에서는 여전히 수입의존도가 높은 상황이다.
커넥터의 경우 각 부품업체들이 자사의 제품과 환경에 맞게 자체 제작, 사용하고 있는 조립기를 제외하고 프레스·사출기 등 핵심 장비는 대부분 일본·미국·유럽지역 업체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수정디바이스 분야는 각도측정기가 미국·일본·독일 등지서 전량 수입되고 있는 것을 비롯해, 원석절단기(커팅기)·주파수분류기·증착기(사운더스)·웰딩기(오리진)·테스터 등 대부분의 제품을 외산에 의존하고 있다.
부품공정·조립공정·포장 등 주요 공정이 3분야로 나뉘는 트랜스는 권선기를 비롯해 상당 부분의 범용장비가 국산화됐으나 핵심 계측장비는 일본·미국 등에서 대부분 수입되고 있다.
이밖에 소형모터·전지·스피커·튜너·데크·스위치·릴레이 등 나머지 일반부품과 통신부품, 파인세라믹부품 등 유망 부품들도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범용장비의 일부만 자체 조달해 사용하거나 국산화됐을 뿐, 고가의 핵심 장비는 대부분 외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상황이 비슷하다.
이처럼 전방산업인 부품산업은 세계적인 생산국으로 발돋움했는데도 관련 장비산업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부품산업의 현주소다. 특히 일부 범용 부품장비는 수많은 업체들이 국산화를 추진했다가 도태돼 현재는 겨우 명맥을 유지하기도 버거운 실정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핵심 부품·컨트롤러·설계기술 등 기반 기술력의 취약과 좁은 내수시장, 그리고 부품업체들의 맹목적인 외산장비 선호의식 및 정부의 장비산업 육성정책 부재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생긴 결과라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그렇다고 전혀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다. 반도체장비 분야에서처럼 LCD장비 영역도 지난 94년부터 LCD장비 국산화가 중기거점사업으로 선정돼 오는 99년까지 연차적으로 공업기반기술자금이 지원될 계획이다. 삼성전자· LG반도체를 비롯한 모듈업체도 자체 계열사를 통하거나 장비 전문업체와 공조체제를 형성해 LCD장비 국산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실제로 한국DNS·메닉스·한택·평창하이테크·미래엔지니어링 등 중소 전문 장비업체들은 그동안 수입에 의존해온 LCD·PDP분야의 세정 및 측정장비, 검사장비 등을 개발, 관련업체에 납품하고 있으며, LG전자·현대전자 등은 검사장비·공정장비 등을 자체 개발, 생산현장에 적용하고 있다.
더욱이 이들 LCD 장비업체는 수입장비를 대체함으로써 국산 LCD 제품의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부 업체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대만 등 해외업체에도 수출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하고 있어 주목된다.
또한 영화OTS·SMC·백두기업·미농상사·아이맥스트레이딩 등 일부 PCB장비 업체들도 자체 개발한 최신 장비를 외국에까지 수출하는가 하면 개발분야를 첨단 PCB장비로 전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콘덴서용 권취기의 경우도 고려기전이 외산을 빠르게 대체하며 그동안 이 시장을 장악해온 일본 및 유럽 업체의 파상공세에 적극 대응하고 있으며, 프레스·마스킹·웰딩기 등의 분야에서는 광성기전사가, 포밍 및 테이핑기 등 후처리공정 부문에서는 동우정기가 국산 대체는 물론 수출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장비 국산화 노력에 대해 삼성전자 반도체장비구매팀장인 이중용 이사는 『최근 도입되기 시작한 일부 외산 장비의 경우 최초 도입가격과 연간 운영비용을 합치면 1천만달러를 상회할 정도로 장비비 부담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전제하며 『따라서 이에 대응한 국산 장비의 개발과 적용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한 시기이고 그 길만이 국내 부품업체가 세계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갈 수 있는 대안』이라고 말한다.
<주상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