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재미있고 신기한 과학이야기 (27);프랭클린의 피뢰침 발명

 벤저민 프랭클린은 18세기 미국 문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유력한 신문의 발행인·편집인이었고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모태가 된 학교를 설립했으며 미국 철학협회의 창립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1776년의 미국 독립선언서 기초위원으로 서명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과학기술자로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예를 들어 번개가 전기의 방전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피뢰침을 발명한 것도 그였다.

 1747년, 필라델피아에 있던 미국 철학회에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편지에는 당시 유럽에서 한창 관심을 끌고 있던 전기 실험에 대한 소식도 들어 있었다. 프랭클린은 편지를 보고 흥미를 느껴 스스로 몇 가지 실험을 했으며, 또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실험의 아이디어도 구상해서 그 내용을 다시 런던에 보냈다.

 그의 편지는 유럽에서 높은 평판을 얻으며 프랑스어로도 번역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번역을 하던 프랑스의 달리바르라는 과학자가 편지 내용에 흥미를 느껴 직접 프랭클린이 구상한 실험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번개가 전기라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구름에서 번개를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실험이었다.

 1752년 봄 달리바르는 늙은 퇴역 군인을 한 명 고용해 외딴 오두막집에 높이 솟은 쇠막대를 단 의자를 설치한 다음, 날씨가 나빠지기를 기다렸다. 의자와 바닥 사이는 유리병으로 절연했다.

 두어 달 후인 5월 10일, 마침내 벼락이 쇠막대에 떨어졌다. 실험의 관찰과 기록을 맡았던 승려가 황급히 오두막으로 달려가자 마을 사람들은 군인이 벼락에 맞아 죽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우르르 몰려갔다. 그러나 오두막 안에서 군인과 승려는 놋쇠철사를 들고 쇠막대에 접근시키며 한창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고 승려는 팔에 불꽃을 맞아 흉터가 나기도 했다.

 이 실험은 커다란 화제가 되어 곧 프랑스 전역에 퍼졌고, 마침내 파리에서 국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험이 재연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미국의 프랭클린은 자신의 편지가 유럽에서 커다란 흥분을 불러일으킨 줄은 까맣게 모른 채 독자적으로 실험에 착수했다. 그는 연을 만들어 띄워서 번개를 유도해냈다. 당시 그는 실험이 실패할 경우 세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을 우려하여 20대 초반인 아들만 데리고 조용히 진행시켰다고 한다. 1752년 6월의 일이었으며, 실험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번개는 전기방전이라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프랭클린은 자신이 입증한 사실을 바탕으로 피뢰침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는데 이 발상은 1753년에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 때문에 곧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즉,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같은 실험을 하던 리히만이라는 교수가 벼락에 맞아 즉사했던 것이다. 사실 먼저 같은 실험을 했던 프랑스의 군인과 승려, 그리고 프랭클린은 무척이나 운이 좋았기 때문에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프랭클린이 발명한 피뢰침은 널리 보급되었지만, 당시 미국과 영국은 사이가 아주 나빴고 영국 국왕은 미국 「반역자들」의 지도자인 프랭클린을 몹시 미워했다. 그래서 피뢰침도 프랭클린이 권장하는 대로 뾰족한 것을 쓰지 않고 뭉툭하게 생긴 것을 쓰도록 했다. 궁전이나 정부의 화약고 등에는 온통 뭉툭한 모양의 피뢰침이 달렸다.

 국왕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왕립학회 회장으로 하여금 뭉툭한 피뢰침이 더 안전하다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당시 회장인 존 프링글은 이를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자연의 법칙은 폐하도 거스를 수 없습니다.』

 한편 바다 건너 프랭클린은 그 얘기를 전해듣고 이렇게 말했다. 『왕이 어떤 종류의 피뢰침이든 아예 안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왕 같은 인간은 그냥 벼락에 맞아 죽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박상준·과학해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