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사회의 원동력은 경쟁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전자산업과 이에 관한 연구개발(R&D)은 곧 경쟁과 발전의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벤처기업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새너제이에서는 하루에도 수많은 모험기업들이 생겨나지만 성공적으로 살아남는 기업은 한두 개에 불과하다는 것은 곧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가를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좋은 사례다.
우리나라는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기업이 된 예도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겪는 일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벤처기업으로부터 얻는 경험이 없이는 R&D의 중요성을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
벤처기업 인텔의 창업자 앤드루 그로브(Andrew Grove)는 헝가리의 미국이민 1세로 가난하고 외로운 젊은 시절을 보내며 전자공학을 공부했다. 그는 회사를 일으켜 연간 50억 달러 이상의 이익을 내는 회장이 됐지만 사원과 똑같은 크기의 작은 집무실에서 근무하는 구두쇠였다. 그러나 R&D를 위해서는 이익금의 20% 이상을 쓴 것을 보면 첨단을 유지하기 위한 그의 신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계적인 첨단기업을 유지해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에서 대형과제는 대기업이 아니고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특히 정부의 도움 없이는 과제수행이 거의 불가능한 것들도 있다. 개발규모가 큰 과제는 몇 개의 대기업이 컨소시엄을 형성해야 하는 것들도 있다. 지난 85년 창설된 한국영상기기연구조합의 경우 지금까지 여러 가지 대형 과제들을 기업간의 공동연구로 수행하고 있다.
이 조합은 그동안 고선명(HD)TV와 차세대 VCR·캠코더 등에 관한 과제를 수행했고 VDR(Video Disk Record)와 IPCTV(Intelligence PCTV)와 같은 과제들에 대한 연구가 현재 진행중에 있다.
HDTV의 연구는 지난 90년부터 대우·삼성·LG·현대가 협력해 정부의 지원 아래 4년간에 걸쳐 진행해왔으며 꾸준한 R&D 끝에 금년 9월KBS와 공동으로 인공위성을 통한 시험방송에 성공했다. 계획대로라면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때 본방송이 실현될 전망이다. 그때 개막식과 시합장면을 고선명도의 TV화면을 통해 볼 수 있을 것이니 참으로 기대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차세대 캠코더는 지난 4년간의 연구가 금년으로 끝나고 시제품의 제작에까지 이를 전망이다. 이 과제들은 모두가 이미 우리 앞에 성큼 다가선 영상시대의 꽃이 되는 것이다.
사람도 하나의 정보처리시스템으로서 정보입력의 80% 가까이를 눈을 통해 영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눈을 통한 정보원의 품질을 높이는 것은 바로 우리 생활의 질을 그만큼 향상시키는 것이다. 이제 디지털 카메라나 VCR 그리고 캠코더는 컴퓨터와 함께 눈을 통해 정보를 전달해 주는 영상시대의 필수품이다. 활짝 열린 컴퓨터시대에 디지털 VCR와 캠코더는 HDTV와 함께 우리에게 생활의 고품질 시대를 열어주는 문명의 이기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R&D를 위해 땀을 흘린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HDTV와 차세대 VCR 및 캠코더의 과제는 대우·LG·삼성·현대의 협동으로 이뤄진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과제들이 도출될 당시 이들 그룹의 멀티미디어 연구소장들과 실무자였던 대우의 유시룡·장규환·이진구·장일성씨, LG의 최상규·이채우·김영일·임용택·노세룡씨, 삼성의 이주형·송동일·이선태·이상호씨 그리고 현대의 이봉환씨와 연구조합의 김념씨 등 2백명이 넘는 연구원과 대학연구소 그리고 중소기업들이 의기투합해, 「우리나라에 첨단 멀티미디어 시대를 열겠다」는 투철한 기술자 정신과 사명감으로 공동연구에 협력하고 정부가 적극 후원한 결과다.
이 과제들을 수행하면서 보여준 각 연구원, 각 팀, 각사의 경쟁과 협력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경쟁시대를 맞아 첨단연구과제를 도출하고 경쟁과 협력으로 성공시키는 지혜는 우리 전자산업계의 성숙한 일면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국제화시대에 경쟁국과 정보를 교환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며, 이 분야의 국제표준화를 위해 MPEG 1V와 같은 워킹그룹에 참여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과 첨단지식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국가적으로 필요한 대형과제에 대해서는 기업간의 협력과 경쟁으로 공동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 전자산업이 국제적 선두그룹에 서는 길이 될 것이다.
〈박규태 연세대 명예교수·전자공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