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창간16주년] 전자산업 지도가 바뀐다 Ⅰ.. 숨가쁜 구조조정

 전자·정보통신업계에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지난해 말 몰아닥친 국제통화기금(IMF)태풍으로 온 나라가 심한 몸살을 앓으면서 전자·정보통신업계 판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제품력·자금력 등 기반이 허약한 업체들은 내수 위축·수출 둔화라는 경기침체로 인해 경영난을 견디다 못해 쓰러지고 있다. 부채가 많은 기업은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까지도 금융권으로부터 회생불능 또는 부실기업이라는 판정을 받아 자금지원을 한 푼도 받을 수 없게 돼 그야말로 업계에서 퇴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간 문어발식으로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던 대기업들이 생존차원에서 「매출 확대보다 수익을 우선시」하면서 경쟁력이 없는 사업의 경우 매각 또는 분사를 추진하는 등 사업구조조정에 적극 나서면서 이들 대기업에서 떨어져 나온 전문업체들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의 벤처기업 육성 정책과 맞물려 독특한 아이디어나 첨단 기술력을 보유한 일반인 및 대학생들이 앞다퉈 벤처창업에 나서는 등 시장 재편은 빠른 속도로 이뤄지고 있다.

정부가 중복·과잉투자 산업에 대한 구조조정 작업 방침을 밝히면서 재계가 본격화하고 있는 사업교환(빅딜)이나 「달러 확보만이 IMF탈출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범국가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외국인 투자 유치도 전자·정보통신업계의 판도를 바꾸는 요인이다. 또한 급격한 기술변화에 따라 외국업체와의 제휴, 시장개방에 따른 외국 유명업체의 잇따른 국내진출 붐 등도 전자·정보통신업계의 지도를 급속하게 변화시키고 있다.

 이같은 요인에 따라 전자4사를 축으로 한 전자·정보통신업계의 판도는 이제 전자4사와 소규모 군단이 어우러지는 형태로 급변하고 있다. 최근 정부의 금융구조조정 작업과 맞물려 해태전자·LG전자부품·오리온전기부품·삼성시계 등 14개 전자·정보통신 관련업체들이 부실기업으로 판정났으며, 현대전자·LG산전 등 일부 대기업들은 구조조정의 칼날이 닥치기 전에 사업구조조정의 방안으로 기업인수합병(M&A)이나 분사제도 등과 같은 「가지치기작업」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특히 대기업들은 물론 중견기업들조차 적자생산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경쟁력을 상실한 제품설비들을 매각하는 사업구조조정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상대적으로 중소기업들이 장악해 온 전문분야시장에까지 큰 회오리를 몰고 오고 있다. 이에 따라 일부 품목의 경우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치열한 경쟁이 나타나고 있다.

 재계의 사업구조 조정으로 이뤄진 LG반도체-현대전자 반도체부문의 합병은 시장지배력을 한층 단단히 한 결과를 낳고 있으며, 재무구조가 취약한 기업들이 부도를 내고 쓰러지거나 경쟁업체들의 사업포기로 오히려 독점체제를 누리게 되는 사례도 종종 생겨나고 있다. 반도체와 함께 최근 중복·과잉투자로 대기업간의 빅딜대상에 거론되고 있는 박막트랜지스터 액정표시장치(TFT LCD)·이동통신분야 등의 새로운 판짜기의 결과에 따라서는 전자·정보통신산업 구조 전반에 걸쳐 대변혁이 일어날 전망이다.

 삼성·LG·현대·대우 등 국내 전자 대기업들이 자체 구조조정 과정에서 도입하고 있는 특징적인 제도는 종업원사업분할제(EBO:Employee Buyout)다. 비주력사업을 분리해 신설회사를 설립하고 해당 사업부장이 생산라인과 영업권, 종업원을 넘겨 받는 대신 고정자산을 장부가격보다 싸게 양도하고 있다. 이미 대우전자가 전자악기사업부를, 현대전자가 PC·위성·HA사업을, LG산전이 5개 비주력사업부문을 EBO형태로 넘겨줬다.

 따라서 그동안 틈새시장을 공략하며 안주해 온 전문영역 시장이 한층 달아오를 전망이다. 반면 상대적으로 자금력이나 규모가 적은 중소기업들의 경우 사업분할 매각이나 기업 M&A 등을 통해 새판짜기에 돌입하고 있다.

 정보통신서비스분야는 해외자본 유치를 통한 새판짜기를 시도하고 있다. 정보통신부가 연내 50억 달러의 해외자본을 끌어들이겠다는 공언을 한 데서 볼 수 있듯이 각 통신사업자들은 해외자본 유치를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을 벌이면서 벌써부터 통신서비스시장의 판도변화가 조심스럽게 나타나고 있다. 정보통신분야에서 나타나는 또다른 변화요인은 정부가 기간통신사업자에 대한 1인당 지분한도를 철폐한 것이다.

 이로 인해 통신부문 진출을 위한 대기업들의 각축이 본격화하고 있다. 온세통신과 두루넷을 사실상 소유하고 있는 현대그룹과 데이콤을 소유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 LG그룹 사이에는 하나로통신의 지분확보 여부에 따라 새판짜기의 윤곽이 드러날 전망이다. 현재까지의 관측을 전제로 한다면 한국통신을 중심으로 새로운 종합통신사업자 등장에 따른 2, 3강 체제로의 재편이 예상되고 있다. 투자여력이 살아 있는 SK텔레콤이 가장 가능성 있는 변수이며 대기업 오너십을 전제로 한 하나로통신이 또다른 한 축을 형성할 전망이다.

국내 전자산업을 40년 이상 리드해 온 가전업계는 사업이관과 사업분할 등으로 몸집줄이기에 나서면서 전자산업의 맹주자리를 내놓고 있다. 여기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 이후 시장개방이 본격화되면서 이미 국내 가전시장은 가전3사 대 GE·AEG·필립스·소니 등 초대형 외국 가전업체들과의 양자 경쟁구도가 들어섰고 유통부문 역시 기존 가전대리점 체제에서 전자랜드·테크노마트 등 초대형 유통점과 한국마크로 등 전문대형할인점 체제로 급변하고 있다. 가전업계는 이같은 배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거품제거에 나서고 있다.

 컴퓨터업계는 국내업체들에 의한 새판짜기보다는 외국업체들의 기업 M&A결과에 따라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세계 컴퓨터 사상 최대규모의 빅딜로 관심을 모은 미국 컴팩컴퓨터의 디지털이퀴프먼트 인수는 국내 컴퓨터시장 판도에도 적잖은 변화를 가져다 주고 있다.

 국내 시장에서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한국컴팩컴퓨터가 빅딜을 등에 업고 한국IBM·한국HP 등과 맞먹는 규모로 변모, 한국디지탈과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향후 제품브랜드를 단일화할 가능성이 높다. 이럴 경우 국내 중대형컴퓨터 시장 선두자리를 놓고 한국IBM·한국HP와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일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시스템통합(SI)업계는 매머드급 해외 유력업체들의 M&A 향방이 「태풍의 눈」으로 등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선진기술력을 갖고 있는 해외업체들이 국내업체를 인수해 공공 및 통신, 금융시장 공략의 교두보로 활용할 경우 기존 시장판도에 미칠 파장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여기에 최근 SK그룹과 대한항공이 자사 전산업무를 아웃소싱하는 상대로 한국IBM을 택함으로써 누가 얼마나 아웃소싱능력을 확보하느냐에 따라 판도가 크게 변할 것으로 보인다.

 항공산업·발전기 등 빅딜의 주요대상이 되고 있는 산업전자분야는 공장자동화 및 중공업사업에서 과감한 사업정리와 매각 및 외자유치 등을 통한 업계재편작업이 본격화하고 있다.

 전자부품 시장은 LG전자부품 등 대형 업체들이 퇴출되면서 새판을 짜고 있다. 기술력을 갖춘 전문부품업체들과 외국의 대형 부품업체들을 중심으로 한 재편도 이뤄지고 있다.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그간 전문성없이 자본력을 앞세워 허상을 잡으려 했던 중견그룹들이 일제히 전자부품 사업을 정리하거나 축소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중견그룹들의 사업철수는 이들 중견그룹과 합작형태로 국내 시장에 진출한 외국 부품업체들이 손쉽게 국내 시장을 장악하는 모순을 낳고 있다.

 반면 경제위기 속에서도 기술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시장지배력을 갖고 있는 부품업체들은 M&A 대상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커넥터업체들의 경우 국내 중소업체들이 IMF의 한파에 휩쓸리면서 외국업체들로부터 M&A 제의를 받는 사례가 부쩍 늘고 있는 것이다. 부품업계의 대표적인 M&A 사례로 손꼽히고 있는 PCB원판생산 1·2위 업체인 코오롱전자와 동종 업체인 두산전자의 인수합병은 PCB원판시장의 구도를 단숨에 바꿔 놓았다.

 OECD에 이어 불어닥친 IMF체제는 그동안 대기업과 중소기업, 종합전자업체와 전자부품업체간의 주종관계를 일시에 불식시킨 채 상호협력, 과감한 아웃소싱, M&A 등을 통해 소수 독과점형태에서 다자 과점형태의 새 지도를 그리고 있다.

〈정창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