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한알의 밀알이 되어 (34)

제6부 대망의 70년대-ETRI의 모태 (9)

현재의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과 얼마전 컴퓨터·소프트웨어기술연구소(COMSO)라는 이름으로 ETRI에 통합된 시스템공학연구소(SERI)와의 관계를 뒤돌아보면 새삼스러운 사실 하나가 발견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난 76년 SERI의 전신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전자계산부가 모태가 돼 발족됐던 ETRI가 20여년 후 반대로 SERI를 자신의 한 조직으로 편입시켰다는 얘기다. 정보산업 정책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선 70년대 중반 ETRI가 발족되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76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77년부터 시작되는 제4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 시행을 앞두고 과학기술정책의 틀을 새로 짜게 되는데 그 개편의 시발점이 된 것이 바로 KIST 역할의 재정립이었다. 이를테면 기초과학연구 등 기업과 단위연구소들이 할 수 없는 국책과제는 KIST가 맡고 통신·전자 등 응용 부문은 단위연구소들을 독립시켜 전담케 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해서 76년말 대통령령으로 특정연구기관육성법이 마련되고 이 법에 따라 KIST에서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한국전자기술소(KIET)·한국화학연구소·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한국표준연구소·한국자원개발연구소 등 여러 단위 연구소들이 갈라져 나왔다.

 이 가운데 전자·정보통신 산업과 관련된 것이 KTRI와 KIET이다. KTRI는 76년 성기수가 부장으로 있던 KIST의 전자계산부 산하 전자계산연구실과 KIST의 전기·전자연구부 산하 방식기기연구실 소속 연구원들이 주축이 돼 76년 12월 KIST부설 한국전자통신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충남 대덕단지에서 발족됐다. 그런 다음 1년뒤인 77년 12월 소속이 과기처에서 체신부로 바뀌면서 명칭도 KTRI로 변경된다. 같은 시기에 전자계산부 산하 또 하나의 조직인 전자계산기운영실과 전기·전자연구부 산하 반도체 재료연구실 소속 연구원들을 축으로 경북 구미공단에서 발족된 연구소가 상공부 소속의 KIET이다.

 이렇게 되면서 70년대 후반 우리 나라 전자정보통신산업부문의 출연 연구소는 과기처 소속의 KIST(기초과학), 체신부 소속의 KTRI(전자통신), 상공부 소속의 KIET(반도체·컴퓨터) 등 3두 체제라는 진용을 갖추게 된다.

 3두 연구소체제가 마감된 것은 5공화국 시절인 84년 12월 29일의 경제장관협의회에서였다. 이날 협의회는 KTRI와 KIET의 통합을 전격 의결하게 되는데 그 결과 85년 1월 발족된 연구소가 바로 현재의 ETRI이다. ETRI는 5공화국 후반에 들어서면서 전전자식교환기(TDX), 4MD램, 타이콤 주전산기, CDMA기술 등 굵직굵직한 국책 프로젝트들을 수행하면서 지속적으로 조직외형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반면 KIST전산부의 후신인 SERI는 93년 대전엑스포 93전산화와 성기수의 소장직 사임을 고비로 정체현상을 거듭하다 96년 ETRI부설연구소로 개편되더니 98년에는 마침내 전체 조직의 하나로 흡수 통합되고 말았던 것이다.

 ETRI 뿌리의 한쪽, 그러니까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의 탄생은 72년초부터 73년초까지 1년간 진행됐던 이른바 「메모콜(Memo Call)」프로젝트가 그 배경이 됐음을 알 수가 있다. 「메모콜」프로젝트란 KIST가 6천만원을 받기로 하고 청와대와 전국 5대도시간을 직접 연결하는 핫라인용 전자교환시스템을 개발키로 한 것을 말한다.

 당시 KIST 측은 이 프로젝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제2연구담당 부소장 정만영(鄭萬永, 전 삼성반도체통신 부사장)을 총책임자로 하여 전기·전자연구부 방식기기(方式機器)연구실 실장 안병성(安柄星, ETRI 책임연구원), 전자계산부 전자계산연구실의 천유식(千柳植, ETRI 책임연구원)등 연구원 30여명을 집중 투입했다.

 72년 국내의 전화교환기 사정을 보면 금성통신(현 LG정보통신)이 독일 지멘스의 기술을 기반으로 국내 생산하던 EMD와 동양정밀이 생산하던 스토로거(Strowger) 등 2종의 기계식 자동교환기가 보급된 것이 전부였다. 기계식자동교환기는 전화시설을 대용량으로 확대할 경우 생산성이 현저하게 낮아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청와대가 요구한 초특급 핫라인 교환시스템 기능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콜」팀의 목표는 결국 기계식 EMD교환기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전자식교환기를 새로 제작하는 일이었다. 하드웨어 제작을 맡은 안병성 등 방식기기실 연구원들은 여러 가지 궁리 끝에 EMD교환기의 기계식 교환소자를 들어내고 대신 전자식 시분할전자교환소자로 대체한 다음 교환제어용시스템으로서 데이터제너럴(DG) 일본법인에서 들여온 8비트급 미니컴퓨터 「노바01」을 붙이기로 했다.

 이와는 별도로 천유식 등 전자계산연구실 연구원들은 「노바01」환경에서 작동할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냈다. 청와대 측이 요구한 것은 이를테면 발신자번호로 전화를 걸 수 있는 기능, 상급자의 우선통화권, 최대 50명까지 불러낼 수 있는 콘퍼런스 콜기능, 피호출자 자동연결기능, 단축다이얼기능 등이었는데 이를 소프트웨어로 해결한 것이었다. 일종의 시분할 방식의 전자사설교환기가 제작된 셈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전자교환기의 일부인 제어용 「노바01」컴퓨터가 교환기의 시분할처리기능을 지원하지 못했다. 애써 개발된 소프트웨어가 무용지물이 될 지경이었다. 연구원들 모두 소프트웨어개발이나 회로소자 기술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전자통신 개념이나 지식은 전무하다시피했던 시절이었다. 결국 실시간 시분할교환처리기능이 가능한 미니컴퓨터를 직접 개발하기로 했다. 「노바01」을 역분석하는 기법으로 개발된 컴퓨터가 바로 「세종1호」이다. 「세종1호」는 현재 국내에서 개발된 국산 컴퓨터 제1호라는 공식기록을 갖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청와대가 요구했던 초특급 핫라인용 전자교환기는 약속한 시점인 73년 3월을 기해 「K1T-CCSS」라는 이름으로 완성이 됐다. 그럴 즈음 전혀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청와대측에서 "대통령이 직접 사용하기에는 다소 불편한 점이 있다"라는 이유를 들어 「K1T-CCSS」를 납품 받지 못하겠으니 프로젝트에 소요된 비용은 「K1T-CCSS」를 상용화해서 해결하라는 일방적인 통고였다.

 KIST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KIST차원에서 「K1T-CCSS」를 상용화할 기업을 찾아 나서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EMD와 스트로거를 공급하는 금성사와 동양정밀 측의 대정부 로비에 번번이 부딪쳤다. 천유식을 필두로 고건(高健, 서울대 교수), 김동규(金東圭, 아주대 교수), 한영철(韓永哲, 삼성전자 상무) 등 20여명 이상의 연구원을 메모콜팀에 파견했던 전자계산부장 성기수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어느날 성기수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동아일보」의 J기자에게 EMD를 공급하는 금성통신 측의 횡포를 적나라하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 그 요지는 EMD가 기계식이어서 전화기 한 대 가입비가 백만원에 이른다는 것과 그나마 정권과 결탁하여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대안으로 전자식교환기를 도입하면 전화가입비가 크게 낮아져 우리 나라도 1가구 1 전화시대가 올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물론 어떤 의도를 갖고 얘기한 것은 아니었다. J기자는 이 기사를 다음날 「동아일보」 과학면에 대서특필 해버렸다.

 며칠뒤 금성통신의 윤욱현(尹昱鉉) 사장이 성기수를 찾아왔다. 이에 앞서 성기수는 윤 사장이 각계 요로에 자신의 파면을 청탁하다가 결국은 실패했다는 점을 귀동냥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윤 사장은 성기수를 보자 깍듯이 예를 올리며 KIST 전자계산부와 금성통신간 전자교환기 공동개발 자금으로 10억원을 제시했다.

 10억원 건은 결국 여러 가지 이유로 무산됐다. 그 대신 금성통신은 나중에 미국 ITT사의 반전자교환기 「M10C」를 국산화하는 「스타렉스」의 개발과정에서 메모콜팀에 참가했던 여러명의 연구원들을 파격적 대우조건으로 스카우트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한사람이 성승희(成承熙, 데이콤 본부장)다.

기수 등 KIST 측 관계자들이 백방으로 뛴 덕분에 74년 미국 GTE사가 「K1T-CCSS」를 50만 달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KIST 측과 공동으로 상용화하겠다고 나섰다. 76년 KIST의 기존 메모콜 팀은 GTE와 공동으로 5백 회선 규모의 자동구내교환기(PABX)인 「GTE/KIST-500」을 개발했다. GTE는 이것을 77년부터 삼성그룹과의 합작법인인 삼성GTE를 통해 국내 공급하기 시작했다. 삼성GTE는 80년 4월 한국에서 철수하는 GTE의 지분을 모두 인수하고 회사 이름도 삼성반도체통신으로 바꿨다. 이 회사는 89년 삼성전자에 합병됐다.

 한편 「K1T-CCSS」개발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KIST 주변에서는 이제 한국에서도 전전자식교환기(TDX)를 개발할 때가 왔다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이 목소리가 때마침 튀어나온 정부의 과학기술 재편 정책과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일환으로 수립된 통신사업 5개년계획 등에 맞아 떨어져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의 발족으로 빛을 보게 된 것이었다.

 KTRI 창립 멤버는 모두 70명 가량이었는데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40여명이 성기수의 전자계산부 소속 연구원들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