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취미 94> 비디오테이프 수집-ISS 김홍선 사장

 『새벽까지 일하다 보면 생각이 막힐 때가 있죠. 그럴 땐 열 번도 더 봐서 클라이맥스 장면에 가면 대사를 줄줄 외울 정도가 된 비디오테이프를 또 돌려봅니다. 여긴 지루한 장면이다 싶으면 비스듬히 누워서 귀퉁이가 다 낡아 헤진 만화책을 들척이기도 하구요. 그러면 신기하게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든요.』

 정보보안업체인 ISS 김홍선 사장(37)의 취미는 비디오테이프 수집이다. 대본소에 몇 권 남아 있지 않은 그때 그 시절의 인기 만화도 서재에 차곡차곡 모아두고 있다. ISS는 장영실상을 수상한 「바이러스 월」과 방화벽 「시큐어쉴드」로 정보보안시장에 뛰어든 벤처업체. 기술개발 경쟁에 마케팅전략까지 쉴 틈이 없을 첨단 비즈니스업계의 젊은 사장과 비디오테이프.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궁합처럼 보인다. 하지만 엔지니어 출신의 사업가에게는 좋아하는 영화를 몇 번이고 되감아 보는 동안 하드디스크드라이브를 포맷하듯 머리를 깨끗이 비우고, 만화책을 통해 세상을 한번 거꾸로 뒤집어 보는 것보다 더 좋은 취미도 드물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김 사장이 비디오테이프 수집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미국 퍼듀대 유학시절부터다. 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집과 연구실을 들락거리며 프로그램과 씨름해야 했던 그땐 사실 비디오 보기 외에 별다른 취미를 가질 시간 여유도 없었다.

 『어려서부터 영화를 워낙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극장에 갈 틈을 낼 수 없더군요. 동네마다 비디오숍이 몇 개씩 들어선 우리나라와 다르게 거기선 테이프 빌리기도 쉽지 않죠.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마음에 드는 영화가 있으면 비디오 출시를 기다려 인터넷으로 구입을 하는 거였습니다. 콜럼부스라는 유통업체가 제 단골이었죠.』

 그렇다고 김 사장이 비디오테이프를 수백개 소장하고 있는 수집광은 아니다. 한달에 한두 편씩 사들여 지금까지 고작 70여편 정도를 모아 놓았을 뿐이다. 영화 역사상 남을 걸작이나 희귀필름도 별로 없다. 잭 니콜슨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던 법정드라마 「어 퓨 굿 맨」이나 SF영화의 고전 「백 투 더 퓨처」, 아네트 배닝의 매력이 돋보였던 「대통령의 연인」처럼 대부분이 할리우드 상업영화들. 유학시절 비디오테이프로 녹화를 해둔 케이블TV의 미니시리즈물 중에도 아직 보관하는 작품들이 여러 편 있다. 아내가 특히 좋아했던 연속극 「빨간 머리 앤」이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로 스타덤에 오른 엘리자베스 슈의 무명시절을 볼 수 있는 「베이비 시터스 어드벤처( Babysitter’s Adventure)」, 서부 개척기를 무대로 신천지를 찾아 떠난 미국인들의 이주사를 다룬 「센터니얼」 등은 그의 애장품들.

 『그때 비디오 주문하랴 케이블 프로그램 예약 녹화하랴 부산을 떨었던 게 미국이라는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줬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랩송을 처음 들어본 건 길거리가 아니고 마이클 J 폭스가 야심만만한 젊은이로 등장하는 TV연속극 「패밀리 타이스(Family-ties)」에서였습니다.』

 김홍선 사장은 지금도 외국 출장을 떠날 때면 좋아하는 테이프 몇 개, 그리고 허영만의 「미스터 큐」나 고우영의 「마요일」 같은 시리즈물 만화를 가방에 챙겨 넣는다고 말한다. 30대 중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동안(童顔)을 하고 중요한 계약을 앞둔 출장길 기내에서 만화책을 펼쳐들 수 있는 여유와 솔직함이야말로 중압감이 심한 하이테크기술의 전쟁터에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그의 자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선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