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 대망의 70년대-5.16 민족상 (11)
98년 5월 16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대통령 묘역. 장대비가 억수같이 퍼붓고 있는 가운데 김종필(金鐘泌) 5·16민족상 총재가 분향을 하고 그 모습 뒤에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경건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면면을 보면 대개는 60∼70년대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원로정치인, 원로군인, 그리고 33회째를 맞이한 5·16민족상 수상자들이었다.
이날 성기수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제33회 5·16민족상 과학기술부문 심사위원의 자격으로서였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성기수는 누구보다도 남다른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살아 생전 마지막, 그러니까 79년도 5·16민족상 수상자이기도 했다. 19년전 그는 사회적으로 최고권위를 가졌던 5·16민족상을 수상했다는 자부심에 앞서 과학기술자로서 자신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보여 줬던 박 대통령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에 벅찬 감동을 느꼈었다. 그런 박 대통령을 꼭 한번 찾아뵌다는 것이 어느새 19년이 흘러버린 것이었다.
79년 성기수를 5·16민족상 후보로 추천한 사람은 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소장 천병두(千炳斗. 86년 작고)였다.
성기수를 추천할 당시 천병두는 5·16민족상 심사위원이기도 했다. 68년 유치과학자로서 KIST에 발을 들여놓은 천병두는 제3연구담당 부소장을 거쳐 78년 4대 KIST 소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천병두 역시 전임 소장들과 마찬가지로 자기주장이 강하고 빈틈이 없었던 성기수를 탐탁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두사람 간에는 공식적인 만남 외에는 사적인 친분이나 교류도 거의 없던 처지였다. 그러던 천병두가 다른 상도 아닌 5·16민족상에 성기수를 추천한 것은 78년 말 사우디아라비아 왕립과학기술연구소(SANCST)를 방문했던 일이 계기가 됐다. KIST 한 울타리에서조차 얼굴 대하기가 힘들었던 두 사람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만난 것부터가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천병두는 SANCST 측이 위촉한 이사로서 때마침 열린 이사회에 참석 중이었다.
75년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간에 체결된 경제기술협력협정에 따라 KIST 소장은 SANCST의 당연직 이사를 겸임하도록 되어 있었다. KIST는 또 여러 분야에서 SANCST 측의 기술 자문에 응해주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성기수가 천병두와 별도로 SANCST의 초청을 받은 것은 바로 이 자문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이때 SANCST는 미국의 민간소프트웨어회사인 인포매틱스(Informatics)를 참여시켜 대규모 사우디아라비아 과학기술정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SANCST는 이 과정에서 전산화 경험이 많은 성기수에게 이 계획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방문 사흘째 되던 날 성기수는 SANCST 측과 인포매틱스사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과학기술정보 데이터베이스 구축관련 워크숍에서 연설할 기회를 가졌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는 성기수였다. 영어로 진행된 이날 워크숍에서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과학기술정보 데이터베이스가 어떤 방향과 내용으로 구축돼야 하는가를 설명한 뒤 말미에 이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KIST 전산개발센터가 맡고 싶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혀버렸다.
원래 이 프로젝트를 맡기로 했던 인포매틱스사의 기술담당 부사장은 68년 KIST 전산실 발족 때부터 모든 것을 지도했던 바텔기념연구소 출신으로서 이를테면 성기수에게는 스승과 같은 인물이었다. 정리(情理)로 볼 때 면전에서 스승의 밥그릇을 달라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이미 내정상태에 있는 프로젝트를 파기시키는 일은 국제관례상으로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기수는 워크숍에 참석했던 부사장 면전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SANCST측 관계자들에게 분명하게 밝힌 것이었다. 무르익을 대로 익은 KIST 전산개발센터의 소프트웨어 개발기술과 경험을 외국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성기수의 돌출 아닌 돌출 발언을 계기로 KIST 전산개발센터는 결국 인포매틱스로부터 사우디아라비아 과학기술정보 데이터베이스 구축 프로젝트를 넘겨받는데 성공했다. 주한 미군이나 한미연합사령부 프로젝트는 더러 해봤지만 순수 외국계 프로젝트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80년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9년간이나 계속됐으며 KIST 전산개발센터가 사우디아라비아 정보산업시장에 진출하는데 교두보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중동지역 국가들의 국가행정업무전산화 프로젝트들을 수주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천병두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성기수를 만난 것은 바로 SANCST 워크숍 현장에서였다. 과학기술정보 데이터베이스는 워낙 중요한 프로젝트였으므로 SNACST 이사진들이 모두 성기수의 프레젠테이션에 참석했던 것이었다.
천병두는 나중에 서울에 돌아와서 소장실을 찾은 성기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말솜씨, 뚝심, 애국심… 모두 반했어요. 5·16민족상은 당신 같은 사람이 받아야만 하오.』
다음날 천병두는 5·16민족상 심사위원회에 성기수를 추천한 다음 기술담당부소장 박원희(朴源熺, 전 KIST 원장)를 불러 성기수가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성기수에게 5·16 민족상이 돌아갈 수 있도록 KIST 전체에 특별지시를 내린 셈이었다. 이런 노력으로 성기수는 수많은 후보들을 물리치고 79년도 5·16민족상 학예부문 수상자로 결정이 됐다. 전체 수상자는 학예·교육·사회·산업·안보 등 5개 부문에서 2명씩 모두 10명이었다. 성기수는 본상 수상자인 사학자 이병도(李丙燾, 89년 작고)와 함께 학예부문의 장려상을 받았다. 말이 본상과 장려상이지 서로 전문분야가 달라 사실은 상격(賞格)의 차이는 별로 없었다.
79년 5월 16일 오후 6시 청와대 영빈관. 김종필 의원 등 5·16 주체인사 44명과 청와대 특보, 수석비서관 등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79년도 수상자를 위한 대통령 주최 칵테일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은은한 실내악이 울리고 있는 가운데 박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식장 전면에 마련된 헤드테이블에서 칵테일 잔을 든 채로 수상자들과 격의없는 담소를 나눴다.
79년 5월 17일자 한 조간신문은 사진과 함께 이날 청와대 영빈관 칵테일파티장을 스케치한 대형박스 기사를 실었는데 전체 분량의 5분의 1 쯤이 박 대통령과 성기수가 나눈 대화로 채워져 있었다. 그날 행사장의 화제가 단연 성기수로 모아졌음을 입증해 주는 대목이다. 기사의 일부를 소개한다.
박 대통령:성박사는 아무리 봐도 박사 같지 않고 중학생 같군요. 성박사는 하버드대 3백년 역사에 2년 만에 최단기 석사와 박사학위를 따서 기록을 세운 천재지요. 우리 나라의 전자계산 보급 및 기술수준은 어떠합니까.
성 박사:운용기술은 상당히 발전했지만 제작이 문제입니다.
박 대통령:컴퓨터원리는 아무리 들어도 잘모르겠더군요. 몇 년 전에 KIST 성 박사 방에 들른 일이 있는데 키를 조작하니까 금방 내 얼굴이 그려져 나오더군요.
성 박사:그 당시에는 미술대학생들에게 각하의 모습을 그리게 한 뒤 컴퓨터에 기억시켰던 것인데 지금은 사진만 있으면 됩니다.
박 대통령:(주위 사람들에게) 성 박사의 머리가 왜 짧은지 아십니까. 미국서 이발소에 갔더니 중학생인 줄 알고 머리를 짧게 깎아 지금 다시 기르느라고 그렇답니다. (폭소) 〈동아일보 79년 5월17일자〉
박 대통령은 이날 칵테일파티와 만찬을 마치고 돌아가는 성기수를 서양식 포즈로 와락 품에 껴안으며 예의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성 박사! 나를 위해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일해주시오.』
한편 이날 5·16민족상 수상자 가운데는 주위 사람들이 별로 주목해 주지 않았던 정복차림의 한 장군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보안부문 장려상 수상자인 보안사령관 전두환(全斗煥) 소장이었다. 전두환 장군의 수상 이유는 79년 3월까지 재직했던 1사단장직을 훌륭하게 수행했다는 공로였다.
수상자들끼리 수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성기수는 전두환 장군의 인상이 뭔가 독특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박 대통령이 자신의 짧은 머리에 대한 우스갯소리를 하고 장내가 폭소가 터졌을 때도 전 장군의 얼굴은 무표정했고 분위기에 따라 가끔씩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성기수가 전 장군을 다시 본 것은 그로부터 3년 뒤 82년 7월 청와대 소접견실에서였다. 한사람은 대통령이 돼 있었고 다른 한사람은 KIST 전산개발센터 소장, 여전히 그대로인 채였다.
그의 내방 이유가 당시 한치의 양보도 없던 여야(與野)의 극한적 대치상황과 맞물린, 이를테면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3년전 성기수의 모습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