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한알의 밀알이 되어 (37)

제7부 격동의 시대-신군부와 KAIST의 발족 (1)

10·26은 사회와 정치분야뿐 아니라 과학기술분야에서도 한 시대가 마감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됐다.

 이에 앞서 정부가 기초응용종합연구소였던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단위연구소 중심으로 개편한 것은 76년 12월이었다. 77년부터 시작되는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제4차 5개년 계획의 핵심은 중화학공업의 육성이었는데 이를 위해 정부가 응용기술 개발에 주력할 각 분야 단위연구소 설립을 추진하고 나선 것이다. 한국전자기술연구소·한국통신기술연구소·한국표준연구소·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한국화학연구소·자원개발연구소·한국핵연료개발공단·한국선박연구소 등 KIST에서 독립해 나온 단위연구소들 역시 이때 출범했다.

 중화학공업 육성정책 중심의 4차 5개년 계획에 결정타를 먹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78년의 제2차 오일쇼크였다. 충격이 유난히 컸던 것은 73년의 제1차 오일쇼크 이후 경제 구조조정을 거치지 않은 채 의욕 하나만으로 추진했기 때문이었다. 경제불안과 경기후퇴 등 각종 현안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10여년 동안 이어졌던 확대재정에 의한 낙관적 경제운용에 일대 경종이 가해졌다. 경제 전반에서 중화학공업 분야에 대한 집중투자로 야기된 왜곡현상을 시정하기 위한 대대적인 투자 조정작업이 요구됐다.

 KIST에서 갓 독립한 신생 출연연구기관들도 업계로부터 연구수탁이 부진해지면서 재정자립도가 낮아지는 등 직접적인 타격이 가해졌다. 79년 들어서면서부터 이제까지의 연구소 운영 및 성과에 대한 반성과 함께 새로운 연구개발 방향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KIST 역시 79년 10월 19일 두명이던 연구담당 부소장직을 하나로 통합하고 개발담당 부소장을 시스템연구 담당 부소장으로 개편하는 등 연구기능을 재조정하는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그리고 나서 꼭 1주일 만에 10·26이 터졌다.

 10·26 이후 들어선 신군부는 연구기관들이 스스로의 환경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주지 않았다. 80년 들어 신군부는 출연연구소들에 대해 대대적인 통폐합 조치를 선언했다. 과기처가 신군부에 제출한 출연연구기관의 문제점들로는 과제나 연구개발의 특성보다는 연구기관 수의 과다, 정부 출연금의 증가, 주무부처의 다원화 등 결과에 대한 문제점만 적시돼 있을 뿐이었다.

 통폐합의 기준이 된 것은 과기처가 80년 10월 마련한 「이공계 출연연구기관 기능 재조정」이란 문건이었다. 여기에는 기존의 출연연구기관들이 기능수행의 특성에 따라 국책연구기관, 산업기술연구기관, 기초연구·교육기관 등 3개의 범주로 분류돼 있었다. 결국은 원자력과 표준 등 국책사업에 대한 정책개발분야 범주에서 몇개, 전자·화학 등 산업기술연구 범주에서 몇개 하는 식으로 통폐합 대상 또는 살아남을 연구소들이 결정됐다. 이런 결정에 따라 80년 12월 15개이던 이공계 출연연구기관이 9개로 통폐합됐다. 새로 출범한 기관들의 관할부처도 과기처로 일원화됐다.

 그런데 문제는 기초연구·교육기관으로서 구 KIST와 구 한국과학원(KAIS)이 통합된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었다. 새로 출범한 9개 기관 중 8개는 나름대로 통폐합의 명분이 있었지만 KAIST는 사정이 달랐다. 구 KIST는 66년 제3공화국의 경제개발정책 초기단계부터 15년간에 걸쳐 종합연구를 수행해 왔고, 73년 설립된 KAIS는 석사급 이상 이공계 고급 과학기술 인력양성에 주력해 왔다.

 KAIST의 출범은 이를테면 연구기능과 교육기능이 병존하는 조직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는 기능의 유사성에 따라 출연연구기관을 통폐합한다는 과기처의 원칙에도 맞지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KAIST는 80년대 내내 연구기능과 교육기능의 융화 및 연계가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곤 했다.

 구 KIST가 KAIST로 바뀐 것은 조직의 기능이나 역할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출연연구기관과 마찬가지로 구 KIST 역시 신군부 휘하 국보위 시절이던 80년 8월 22일 천병두(千炳斗·86년 작고) 소장 이하 부소장급 이상 간부들이 「구시대 인물」로 낙인찍혀 모두 옷을 벗었다. KAIS 원장이던 최형섭(崔亨燮·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도 옷을 벗었다.

 당시만 해도 KIST나 KAIS에서 최형섭에 대한 예우는 최고의 것이었다. KIST에서는 최형섭의 과학자로서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79년 1월 소장 직속으로 최형섭연구실이라는 조직을 신설하기도 했다. 과학자로서는 그만한 영예가 따로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최형섭은 8월 22일 이후 KIST 구내 출입 자체를 봉쇄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구 KIST와 KAIS의 고급 간부들이 모두 옷을 벗던 날 두 기관을 동시에 접수한 사람은 KAIS 교수였던 이정오(李正五·전 과기처 장관)였다. 이정오는 「구시대 인물」들이 퇴진한 80년 8월 22일자로 신군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제5대 구 KIST 소장 및 제6대 KAIS 원장직에 겸직 발령을 받았다. 이정오의 역할은 이듬해 1월로 예정된 KAIST 출범때까지 구 KIST와 KAIS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이정오는 소장 취임 직후 구 KIST의 직제에 따라 두명의 부소장을 새로 임명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동물사료연구실장 김춘수(金春洙·단국대 교수)였고 또 한 사람은 전산개발센터 부장 성기수였다. 김춘수는 연구담당 부소장, 성기수는 시스템연구담당 부소장이었다.

 부소장 성기수와 소장 이정오 두 사람은 그렇게 다시 만났다. 본란 제14회(5월 7일자)에서 소개했던 바와 같이 이정오는 성기수가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 서울대학교 대학원 물리학과에 출강할 때 제자로서 인연을 맺었던 인물이었다. 이정오는 또한 그 이듬해 자신이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미국 텁츠(Tufts)대에 유학하게 되는데 이 유학 역시 성기수가 주선한 것이었다.

 구 KIST에서 성기수와 이정오의 직접적인 만남은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8월 22일 취임했던 이정오는 꼭 10일 뒤인 9월 1일 출범한 새 정부의 과기처 장관으로 전격 발탁됐기 때문이다. 물론 이정오는 입각 후에도 두달이 넘도록 KIST 소장직과 KAIS 원장직을 겸했다. 결국 구 KIST와 KAIS의 통합은 두 기관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이정오의 작품인 셈이었다.

 81년 1월 5일 출범한 KAIST는 원장 밑에 구 KIST 조직을 골간으로 한 연구담당 부원장과 KAIS 조직을 축으로 한 학사담당 부원장을 두어 연구와 학사업무를 각각 맡도록 했고, 부설 조직격인 해양연구소와 전산개발센터는 원장이 직접 관장했다.

 출연연구기관 인사권자인 이정오는 초대 KAIST 원장에 자신의 뒤를 이어 구 KIST 소장과 KAIS 원장을 겸하고 있던 이주천(李柱千·KAIST 명예교수)을 임명했다. 두명의 부원장 가운데 12개 연구부 등을 거느릴 연구담당은 구 KIST 출신의 김춘수, 12개 학과를 관리하는 학사담당은 KAIS 출신의 이병호(李炳昊·KAIST 교수)가 각각 임명됐다.

구 KIST에서 시스템연구담당 부소장이던 성기수는 오히려 한 등급 강등돼 80년 당시의 전산개발센터 부장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가 마음에 걸렸던지 과기처는 이듬해인 82년 1월 1일 KAIST 정관에 새로 부설연구소 조항을 삽입해 전산개발센터를 해양연구소와 함께 부설기관으로 승격시켰다. 공식 명칭도 KAIST부설 전산개발센터로 바뀌었고 성기수의 직책도 부장에서 소장으로 격상됐다. 따지고 보면 전산개발센터의 승격과 성기수의 승진은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전산개발센터가 부설기관으로 승격된 것은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 인력이나 부서운영 면에서도 독립할 수 있는 요건이 갖춰졌음을 뜻했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출연연구기관들의 존폐여부를 결정했던 판단기준의 하나가 재정자립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의미가 있었다.

 80년대 KAIST의 재정은 정부출연금과 운영기금에서 발생하는 과실금, 국내외의 찬조금·차입금, 외부 용역, 기타 수입 등으로 충당되고 있었는데 전산개발센터는 활발한 수탁개발이 이어져 각 부서에서 가장 충실한 재정자립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인적 현황에서도 전산개발센터는 82년 당시 연구직 1백59명, 기술직 6명, 행정직 14명, 기능직 1백36명, 사무직 63명 등 모두 3백78명을 거느린 중규모 연구소 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