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의 국제 금융파동 이후로 우리 전자업계에는 상반되는 두 흐름이 있다. 원화가 실질가치보다 고평가돼 왔었기 때문에 고전해 오던 전자제품의 수출이 환율의 급상승으로 매출증가와 경영개선이 되는 하나의 긍정적인 흐름이 생겼는가 하면, 21세기 정보사회를 내다본 미래형 산업이라 해서 왕성한 참여와 투자가 진행됐던 소프트웨어나 네트워크 관련사업 등은 이미 쓰러지지 않았다면 바로 생존의 위협을 받는 냉엄한 상황에 부닥친 것이 또 하나의 부정적 흐름이다.
한때 일본 전기·전자 관련기업들은 세계시장을 풍미한 성공체험으로 경영전략의 역점을 소위 경박단소(輕薄短小)형에 둔 적이 있다. 그러다가 중전기 시장의 수요가 되살아나고 반대로 가전산업은 경쟁이 과열돼 수익성 확보가 어렵게 되자 가전 내지 전자 중심의 전략에서 중전기 쪽으로 방향을 역전환했었다. 그러면서 역시 기술을 바탕으로 한 묵직묵직한 것을 다루는 것이 사업의 옳은 방향이라는 말들을 했었다. 그 뒤로 미국이 정보통신산업에서 크게 앞서가는 것을 보고는 방향이 또 한번 바뀌어 서둘러 통신사업과 영화사업 같은 소프트한 산업으로 적극 나섰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어쩌면 갈피를 못잡고 있는 우리 전자공업의 앞날을 새로 설계하는 데 있어서는 선진국 전자공업의 발전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미국은 세계대전을 이겨낸 최강의 기술력과 세계최대의 소비시장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건국 당시부터 자유롭게 적자생존의 경쟁원리를 실천해 왔었다. 한편 일본은 비록 경쟁의 적절한 규제로 자국의 총체적 이익을 도모해 가는 경쟁제한적 폐단은 있으나 태평양전쟁에서 한때 우세를 점할 수 있을 만큼 오랜 세월을 두고 과학기술의 기초를 닦아 국가적 역량을 쌓아올린 나라이기 때문에 전자제품 개발에 필요한 기술을 십분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에 우리는 경제개발과 성장에 급급해 원천적 기술을 쌓아올릴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독창적인 제품을 개발할 힘이 모자라고 따라서 기술도입이나 선진업체 제품의 카피에 의존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경쟁력의 원천은 신제품 개발에서보다는 생산성 향상과 원가절감에서 찾았다. 이같은 전자공업 특징의 차는 단순히 경쟁력의 격차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각국이 추구하는 산업전략에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짐작이 된다.
우리가 현재 처하고 있는 형편으로 보면 생산구조를 최대한 합리화해 경쟁력을 높여 나가는 것이 우리 경제를 살리는 길이요 국가적으로나 기업으로나 유익하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사람에 따라서는 역시 제조업 중심이 돼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도 있는데 단기적으로만 보면 지당한 생각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이 끝없이 가는 것은 아니다. 앞서 일본의 예에서 보았듯이 경영환경은 부단히 바뀌고 시대는 정보화·디지털화·소프트화 쪽으로 급속도로 기울어가고 있는 것이다.
소프트한 서비스산업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잘 알지도 못하고 덤비다가 우리는 지난번 국제금융부분에서 따끔한 맛을 보았지만 전자공업분야만을 두고 생각해 보면 소프트한 산업으로의 전략전환은 반드시 불리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첫째는 종래의 공산품과는 달라서 단단한 기초과학적 기반 위에서만 독창적 상품이 개발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의 지적 수준이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점이요, 둘째는 모든 것이 변화하고 새롭게 시작되는 터라 우리도 미국이나 일본 등에 비해 크게 출발이 뒤졌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깊이 고려해야 할 점은 우리의 공산품 생산성 경쟁력이 과연 얼마만큼 앞으로 계속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눈앞의 실리에 매달려서 생산구조 합리화에만 전념할 것이 아니라 사고의 폭을 넓히고 우리가 경쟁할 수 있는 적정한 규모의 적정한 영역을 찾아가기만 한다면 소프트웨어나 정보통신분야에서도 세계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할 능력이 충분히 있다. 그래서 당장은 힘들더라도 장차 경쟁력의 원천이 되는 이런 분야에 꾸준히 투자를 해야 할 것이다. 비단 개개의 기업단위뿐만 아니라 국가전체의 구조조정 과정을 지켜보아도 이런 점이 소홀히 되고 있지나 않은가 싶어 우려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