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산업에 대한 오해(이해 부족)
정부 주도로 이뤄지고 있는 5대 그룹 빅딜 정책 가운데 특히 반도체 업종에 대한 반발이 거센 것은 반도체 산업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시장 상황을 무시한 때문이다.
가장 잘 나가던 95년 삼성전자·LG반도체·현대전자 등 국내 반도체 3사의 반도체 수출은 1백46억달러(조립 부문 제외), 경상이익은 총 5조원이다.
하지만 겨우 2년 뒤인 97년 반도체 수출액은 86억달러로 절반 가까이 줄었고 3사의 경상수지는 3천억원의 적자로 전락했다.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이러한 대차대조표의 수치만으로 단순하게 2위 업체와 3위 업체를 합병해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발상이 나왔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한국 D램 산업의 기술력과 생산성이 세계 최고라는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기술 개발력에서 앞서고 생산성도 최고 수준인 국내업체가 앞장서 시장 장악력을 줄이겠다는 생각은 지극히 비자본주의적 발상이다.
이번 빅딜을 바라보는 업계의 시각은 반도체 산업, 특히 D램 산업이 한정된 내수시장에서 「제살깎기」식 과당경쟁을 계속해온 다른 빅딜 대상업종과 기본적으로 판이한 환경을 가지고 있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세계시장을 무대로 세계 일류 산업으로 커온 반도체 분야를 「우물안 개구리」와 같은 근시안적 안목으로 여타 업종과 동일 선에서 이해했다는 사실 자체가 빅딜이라는 무리한 발상을 잉태시켰다는 지적이다.
현재 현대전자와 LG반도체의 64MD램 생산능력은 각각 7백만∼8백만개 수준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양사가 합병될 경우 D램 분야에서 수년째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삼성전자와 거의 비슷한 덩치의 업체가 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16MD램의 경우 LG반도체가 세계 1위 업체라는 점을 감안할 경우 전반적인 생산 능력과 시장 지배력은 현대전자·LG반도체의 합병사가 우위에 있을 것이란 단순한 판단이 함정이라는 얘기다.
우선 전세계 D램의 70% 이상을 구매하는 컴팩·IBM·HP 등 대형 PC업체들은 특정업체에 편중된 구매를 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대개 1개 D램업체의 구매비중을 많아야 20%까지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산량은 불어나지만 판매량은 오히려 줄어드는 기현상이 예상되는 것이다.
3사 체제에서 먹을 수 있는 떡이 3개인데 빅딜이라는 구조조정을 통해 2개로 줄여버릴 가능성이 있다면 이는 개선이 아닌 개악이 분명하다.
더욱이 최근 D램시장의 공급과잉은 국내 반도체업계만이 아닌 세계적인 문제다.
이미 D램업계의 가장 공격적 업체인 미국의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올들어 TI사의 D램 생산라인을 인수하고 싱가포르 등 해외 생산기지 구축에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이 이를 단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국내 반도체 산업은 미국업체들의 끊임없는 반덤핑 공세에 시달리고 있는 업종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시장 지배력이 더욱 커진 거대 D램업체가 탄생할 경우 해외업체들의 견제나 독과점 문제, 통상 압력 등의 부정적인 문제가 더욱 커질 가능성을 예상케 하고 있다.
<최승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