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한알의 밀알이 되어 (39)

제7부 격동의 시대-금융실명거래 파동 (3)-(하)

청와대 소접견실. 긴 탁자 끝으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앉고 왼쪽에 경제수석 김재익(金在益·83년 작고), 그리고 오른쪽 대통령 지근거리에 성기수, 그 옆자리에 재무부 장관 강경식(姜慶植)이 자리를 잡았다. 본론에 이르자 대통령이 다짜고짜로 성기수를 다그쳤다.

 『금융기관들이 저희 멋대로 컴퓨터를 도입해 놔서 그런 자료로는 국세청 컴퓨터가 읽어들이지 못한다는데 이래 가지고 내년(83년 1월)부터 금융실명거래 하겠소? 다른 사람들이 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성 소장이 가능하다고 했다면서요?』

 원래 야당과 여론에 밀려 도입하기로 발표했던 금융실명거래 제도였다. 대통령의 말은 다분히 위압적이었다. 그 말을 지체없이 성기수가 받았다.

 『각하 말씀대로 은행 컴퓨터는 IBM이고 국세청 컴퓨터는 CDC로서 서로 다릅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기종이라 할지라도 서로 데이터 규격만 맞춰주면 얼마든지 처리가 가능합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는 이미 70년대부터 이런 작업들을 많이 해왔습니다.』

 성기수는 당당했다. 김재익과 강경식이 정좌 자세로 『네』 『아닙니다』라고만 답하며 대통령의 말을 수첩에 받아적기에 급급한 판에 성기수는 손으로 제스처까지 지어보이고 다리까지 꼬고 앉는 여유를 보였다. 대통령의 표정이 이그러지는 듯했다. 당돌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물꼬가 트인 두 사람의 대화는 이미 서로의 신분을 잊고 있었다.

 대통령 : 많은 과학자들이 은행과 국세청 컴퓨터를 단일기종으로 통일시킨 뒤 금융실명거래를 해야 한다고 했소. 나도 동감이오.

 성기수 : 공공기관의 컴퓨터가 IBM으로 통일되면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생깁니다. 각하!

 대통령 : 통일되지 않으면 무슨 수로 5천만건이 넘는 금융거래 자료를 처리한다는 말이오. 그런 건 컴퓨터 본고장인 미국에서나 가능한 것 아니오?

 성기수 : 5백만건에 가까운 대입 예비고사 채점도 10일 만에 끝냈습니다. 각하, 그리고 … 제가 학위를 받은 곳도 미국이고 컴퓨터를 배운 곳도 미국입니다. 더구나 컴퓨터는 처음부터 미제 아닙니까.

 대통령과 성기수의 대화는 동석자들이 시종 조마조마한 마음을 떨치지 못한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떤 결론이 나온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성기수가 정치적 계산을 중시하는 대통령을 설득시킨 셈이었다.

 다음날 성기수는 재무부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전날 국회에서 금융실명거래 전산처리가 「복잡할 것」이라던 과기처 장관 이정오(李正五·KAIST 석좌교수)의 답변을 과학기술자의 소신으로써 반박하기 위함이었다. 회견 내내 성기수는 자신만만했고 기자들은 회견 내용 자체를 흥미진진해했다.

 신문들은 그를 『실명화와 7·3 종합과세조치의 성패를 가름할 전산화 작업의 사실상의 총책임자』라고 표현했다. 성기수는 여기에 『KAIST의 전산처리 능력으로 실명화 작업은 무리없이 추진할 수 있다』며 『전산화 작업 때문에 국민이 번거롭거나 귀찮은 일은 없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화답했다. 신문에 대서특필된 이날 회견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기자 : 3천8백만 국민의 인적 사항을 어떻게 파악하나. 더구나 인적 사항이 수시로 변할 텐데.

 성기수 : 주민등록번호·성명·주소 등 기본사항은 내무부가 보관중이며 변동 내용은 국민이 자진신고하게 돼 있다. 변동사항은 1년에 2백50만건인데 일단 3천8백만명의 기본 인적 사항을 기록해 놓으면 변동사항을 체크하는 일은 컴퓨터로 간단하다.

 기자 : 국민 개인의 경제활동과 금융거래 행위를 어떻게 일일이 파악한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컴퓨터 없는 금융기관이 절반이고 도서벽지 등도 있지 않은가.

 성기수 : 우리나라 연간 금융거래 건수는 5천3백만건, 이중 40%는 컴퓨터용 자기(磁氣)테이프에 직접 기록된 자료다. 60%는 컴퓨터가 없는 점포에서 종이에 작성된 것인데…전혀 문제될 게 없다.

 국세청이나 KAIST에서 곧바로 테이프에 기록할 수 있도록 일정 서식에 맞춰질 테니까. 예비고사 답안지를 10일 만에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답안지 서식이 모두 같다는 점, 그리고 시험 전 입시생들에게 답안지 쓰는 법을 확실히 교육시켰기 때문이다. 금융기관 종사자들에 대한 교육은 아주 간단하다.

 기자 : 그래도 컴퓨터 처리장비가 미비하다는 문제점은 있는 것 아닌가. 국세청과 금융기관간 컴퓨터 기종도 서로 다르고….

 성기수 : KAIST 컴퓨터는 1백억자(字)를 동시 기억시킬 수 있다. 개인정보는 40자를 넘지 않으며 모두 5천3백건이니까 20억자의 기억용량만 있으면 된다. 기종이 다르다는 점은 전산화에 대한 이해부족 때문에서 온 오해다. 대통령도 그 점을 지적했는데 전산화는 온라인 형태가 아니다.

 물론 연결되면 금상첨화겠지만 금융실명거래를 위해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각 금융기관들은 한달에 한번씩만 테이프나 서식자료를 국세청에 제출하면 되니까. 온라인화는 10년 계획을 세워 추진할 과제라고 본다.

 기자 : 이자소득 등 개인 세무자료도 모두 신고해야 되나. 또 종합과세는 어떤 과정을 거쳐 계산되나.

 성기수 : 신고문제는 정책당국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다. 금융기관별 자료가 도착되면 국세청 컴퓨터는 이를 주민등록번호(또는 사업자등록번호)에 따라 개인별(기업별)로 분류해 과세를 결정하게 된다. 수천만의 모든 납세자에게는 과세참고자료를 우송해줄 계획이다. 이를 위해 초고속 윤전기에 해당하는 페이지프린터를 40만달러에 도입키로 했다.

 기자 : 전산화 작업 일정은 어떻게 되나.

 성기수 : 7월부터 입력해 10월 말 시험가동에 나선다. 내년(83년) 1월 실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82년 7월 17일자 조선일보·동아일보·중앙일보 관련기사 재구성)

 성기수에 대한 인터뷰 기사는 정치권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특히 야당인 민한당(民韓黨) 의원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섰다. 급기야는 재경위 소속 의원 조순형(趙舜衡·현 국민회의 의원)이 성기수를 참고인으로 채택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즉각 받아들여져 다음날 성기수는 강경식과 함께 재경위에 출석, 여야 의원들의 질문공세를 받았다. 일단 배경설명을 마치자 여당 의원 질의가 쏟아졌다. 성기수는 분명하게 답했다.

『저의 과학기술자적인 소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물론 금융실명거래의 즉각적인 도입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느냐에 대한 판단은 기술자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기수 자신의 입장과 함께 강경식의 입장까지 고려한 답변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날 소신 답변 내용이 다음날 조간신문에 다시 대서특필됐다. 출근하자마자 KAIST 원장 임관(林寬·삼성종합기술원 원장)의 호출명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 답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오? 정부여당을 그렇게 밀어붙여도 살아남을 줄 알았소! 당장 사표 쓰시오! 대체 당신 소속이 과기처요, 재무부요?』

 그날 오후 성기수는 다시 민정당(民正黨) 정책조정실장 박현태(朴鉉兌)와 노태우(盧泰愚) 내무부 장관 방에 잇따라 불려가 곤욕을 치렀다.(박현태는 현재 98년 2월 성기수의 사표로 공석이 된 부산 동명정보대 총장으로 재직중이다.)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금융실명거래법은 재무부안대로 국회에서 통과됐다. 성기수의 사표는 강경식의 중재로 15일 만에 반려됐다. 그 직후 재무부와 KAIST 부설 전산개발센터간 30억원 규모의 전산화 프로젝트 계약이 체결됐다. 비용의 80%는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차관으로 충당됐는데 계약이 빠르게 성사될 수 있었던 것에는 IBRD측의 독촉이 한몫을 했다.

전산개발센터는 성기수의 장담대로 82년 말까지 금융실명거래용 전산시스템을 개발했다. 정부는 물론 83년 1월부터 금융실명거래를 실시하지 못했다. 애당초 관련법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실시시기에 대해 「대통령이 정하는 시기」라고 단서를 달아 놓고 있었던 것이다.(결국은 10년 뒤 문민정부에 와서 시행됐다.)

 대신 전산개발센터는 금융실명거래용 전산시스템을 국세청의 징세업무용으로 이식시켜줬다. 국세청만 노다지를 잡은 격이었다. 이 시스템을 활용한 결과 국세청은 이듬해인 83년 한해에만 무려 3천7백억원의 세금을 더 걷을 수 있었다. 이 공로로 전산시스템 개발을 담당했던 이단형(李檀珩·ETRI 컴퓨터·소프트웨어연구소 부장)이 재무부로부터 상을 받았는데 그 명목은 「민간인 조세협력에 대한 공로」였다.

 KAIST 부설 전산개발센터가 금융실명거래용 전산시스템을 개발해서 마냥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크게는 정부여당에, 작게는 상급기관인 과기처에 항명(?)한 성기수 때문에 전산개발센터는 83년 예산책정에서 정부지원금 가운데 30% 가량 삭감판정을 받았다. 84년 예산에서도 마찬가지의 불이익을 받았다.

 수난은 그뿐이 아니었다. 78년부터 경제기획원과 함께 의욕적으로 추진해오던 행정전산화 충청북도 시범사업 등에 대해 갑작스런 감사가 시작됐다.

<서현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