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난항을 거듭하던 디지털 위성방송용 제한수신장치(CAS:Conditional Access System)의 국내 표준화 작업이 국산 CAS인 「디지패스」의 잠정 표준 폐기를 계기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국내에서 개발된 「디지패스」가 과연 통합 방송법 제정 이후 출범하는 위성방송사업에 국내 CAS 표준으로 채택될 것인가 아니면 완전히 폐기될 것인가 하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현재 국내 위성방송업계는 「디지패스」를 국내 디지털 위성방송의 CAS 표준으로 채택하자는 쪽과 기능상 하자가 많아 국내 표준으로 확정하기에는 문제가 많다는 쪽으로 나뉘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태다. 이같은 상황에서 업계 일각에서는 굳이 국내 표준을 제정할 필요성이 있느냐는 의견도 적극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위성방송사업자가 자유롭게 위성 CAS를 채택하자는 것이다.
일단 잠정 표준으로 채택됐던 「디지패스」가 업계의 반발로 표준확정 단계에서 후퇴했다는 점 때문에 「디지패스」의 개발자인 ETRI와 기술전수 업체들은 현재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매우 불안해 하고 있다.
특히 ETRI측은 『위성방송사업자들이 국내 개발품을 외면하고 외국 방식의 CAS를 채택할 경우 적지 않은 로열티 부담이 생길 것이 분명한데다 지난 9월 정통부·통신사업자·수신기 제작업체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통신 용인위성관제소에서 실시한 「디지패스」의 신뢰성 검증 시험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며 국산 CAS의 채택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최근 실시된 ETRI에 대한 국정감사에서도 「디지패스」가 중요한 의제로 등장했는데, ETRI측은 현재 업계에서 제기하고 있는 신뢰성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다각적인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대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상황에서 최근 정보통신기술협회(TTA) 산하 전파방송분과위원회는 관련업계로부터 새로운 CAS 표준규격에 대해 제안받았다. 이에 따라 ETRI가 개발한 「디지패스」를 포함, 4가지 규격이 새롭게 제시됐다.
일단 ETRI측은 잠정 표준으로 제안했던 「디지패스」의 규격 중 송신기 인터페이스 부분만 삭제해 국내 표준으로 새롭게 제안했으며, 방송사와 가전업체 등으로 구성된 위성방송기술검증협의회측은 「사이멀 크립트」와 「CI(Common Interface)」 방식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이멀 크립트」 방식과 「CI」방식은 기본적으로 유럽의 표준규격인 DVB방식을 기반으로 마련된 규격으로 CAS에 관한 기본적인 인터페이스만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CAS규격을 수용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그러나 위성방송사업자가 가입자 정보를 공유해야 하는 등 부작용도 우려되고 있다.
미디어 재벌 머독과 위성방송사업을 준비중인 DSM측은 특정 규격을 제시하지는 않았으나 CAS 표준이 범용성을 가져야 하며 위성방송사업자의 가입자 정보가 외부에 유출되지 않도록 보안성을 가져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TTA측은 오는 18, 19일 이틀간 위성방송 관련업계 전문가를 대상으로 위성 CAS 표준 제정과 관련해 워크숍을 열고 국내 위성방송사업자들이 채택할 CAS방식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할 방침이다. 이 자리에서는 이미 제안된 4가지 방식에 대한 장단점이 중점적으로 논의되고 향후 어떤 방식을 국내 CAS 표준으로 정할지에 대해 구체적인 토론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위성 CAS 표준제정 문제를 놓고 그동안 1년 넘게 격론을 벌여왔으나 국내 위성방송업계는 아직도 국내 CAS 표준에 대해 명확한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있어 새로운 매체의 등장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통합 방송법 통과 이후 위성방송사업자가 본격 활동을 개시할 것으로 예측되는 만큼 연내에 이 문제를 빨리 매듭지어야 한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한결 같은 지적이다.
<장길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