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국내 건전지업계에 기업 인수·합병(M&A)과 관련된 출처불명의 소문들이 나돈 바 있었다. 당시 떠돌던 풍문의 내용을 보면 「외국 유력 건전지업체가 국내 유력 건전지업체의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로부터 시작해 「국내 모 건전지업체가 외국자본 유치를 추진중이다」 혹은 「모업체가 국내 건전지 판권과 브랜드를 외국업체에 넘긴다」는 등 국내 건전지업체와 외국 건전지업체간의 전략적 제휴설이 대종을 이루었다.
건전지업계에 떠돌던 소문은 9월 들어 현실로 나타났다.
국내 최대 건전지업체인 로케트전기는 세계적 편의품 공급업체인 질레트에 국내 전지판권 및 상표사용권을 올해부터 7년간 임대하는 조건으로 약 6천만달러를 받기로 했다고 전격 발표했기 때문이다.
로케트전기가 외자유치 전략의 일환으로 질레트에 국내 전지판권을 넘겨준 것은 국내 전지업계에는 충격에 가까운 소식이었다.
왜냐하면 로케트전기는 지난 50년간 전지만을 전문으로 생산해온 이 분야 최대 기업이자 국내 건전지산업의 「종가」 역할을 해온 상징적인 기업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로케트전기가 질레트에 국내 시장 판권을 넘겨준 것은 국내 건전지시장 거의 전부가 외국업체의 수중에 떨어지도록 도와줬다는 평가를 낳고 있다.
이와 관련, 정현채 로케트전기 사장은 『매년 매출액이 20% 이상 늘어나는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했는데도 은행권 차입 등으로 인한 금리부담금이 연간 1백60억원에 달해 사업에서 남는 이윤을 이자로 지불하기도 벅찬 실정이었다. 특히 국제통화기금(IMF) 이후 전지 생산에 필요한 국제 원부자재 가격이 45% 이상 올라 전지 가격경쟁력은 떨어진 반면 외국 건전지업체들은 내수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출혈에 가까운 가격공세를 전개해 채산성 악화 압박을 받아왔다』고 저간의 사정을 밝히면서 『이번 전략적 제휴로 인해 로케트전기는 재무구조가 크게 개선됐으며 그 여력을 바탕으로 리튬이온전지 등 차세대 제품개발에 전력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로케트전기가 질레트와 손잡은 데는 그동안 차세대 전지로 부상하고 있는 리튬이온전지 개발 및 연구설비 구축에 1천억원 가량을 투입했으나 양산설비 도입에 따른 추가재원 염출에 한계를 느껴 본격 생산을 장기과제로 남겨 놓은 말못할 사정도 숨어 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로케트전기의 외자유치는 국내 건전지 시장에 적지않은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번에 로케트전기 국내 판권을 인수한 질레트는 이미 로케트전기와 국내 건전지시장을 양분해온 (주)서통의 상표와 국내 판권을 임차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질레트는 이번에 로케트전기의 판권과 브랜드까지 거머쥐게 됨에 따라 사실상 국내 최대 건전지 공급업체로 급부상하게 됐다고 할 수 있다. (주)영풍이 건전지를 생산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국내 시장점유율 측면에서 미미하기 때문에 앞으로 국내 건전지시장은 질레트와 에버드리(일명 에너자이저) 등 2개 외국 건전지업체에 의해 주도될 공산이 커졌다.
특히 만년필·칫솔·문구·면도기 등 편의품 시장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 질레트가 세계적인 다국적 유통업체들과 손잡고 국내 건전지시장을 공략할 경우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게 업계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이처럼 국내 건전지업체가 내수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까닭은 건전지 수요가 올 들어 급감한 데 있다. 국내 건전지 수요의 30%를 차지하는 무선호출기 수요가 올 들어 크게 줄어든 데다 장난감을 비롯한 편의품 수요도 덩달아 줄어 전체 시장이 지난해와 비슷한 2천억원선 남짓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는 매년 10% 이상의 성장률을 보인 것과 대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서통과 로케트전기·영풍 등 국내 건전지업체가 좌절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수익성이 떨어지는 국내 시장보다는 해외 시장에 주력함으로써 채산성을 높이고 미래산업으로 부각되고 있는 2차전지 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설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으려 하고 있다.
지난 96년 국내 전지판권을 임대해준 서통은 이때부터 해외시장 개척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를 위해 서통은 「슈퍼가드」 「뉴파」 「엑셀」이라는 해외시장용 독자 전지브랜드를 제정해 놓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필리핀에서 필름을 생산하고 있는 자회사 BCPI의 전지사업과 홍콩 GPI사와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합작 전지공장 사업이 크게 호조를 보여 고무되어 있다.
서통은 내친 김에 전지플랜트 수출에도 본격적으로 나서 최근 모로코 등지에 대형 전지플랜트를 수주하기도 했다. 서통은 이와 병행 , 그동안 독자개발한 리튬이온전지 제조기술 및 설비를 수출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이 회사는 소니에 이어 세계 두번째로 전기자동차용 대용량 리튬이온전지를 개발, 국제적으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로케트전기도 1차전지 관련 국내 영업권 및 상표사용권을 미국의 질레트사에 임대키로 한 것을 계기로 수출에 주력할 방침이다. 즉 국내와 태국·폴란드 공장을 3각체제로 구축하여 국내 공장에서는 고성능, 고부가가치의 1차전지 생산에 주력, 미주 등에 수출하고 태국공장 생산품은 아시아 및 호주지역에, 폴란드공장 생산품은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권과 서유럽·아프리카 지역에 집중 수출한다는 것. 로케트전기는 또한 이미 기술개발이 완료된 리튬이온전지의 양산을 위한 설비확보에 주력하여 2000년 초 양산에 나설 계획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회사 창립 이래 건전지만을 전문으로 생산해온 기술과 경험을 설비제작에 반영함으로써 세계적인 설비제작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이 회사는 건전지 제조설비 수출에 주력함으로써 연간 3억달러로 추산되는 세계 설비시장에서 2000년 15%를 점유한다는 목표도 세워 놓고 있다.
방글라데시에 망간건전지 제조설비를 처녀 수출한 이래 지금까지 중국·영국·이집트·베트남·인도 등에 망간 및 알칼리전지 제조설비를 수출해 왔으며 최근 모로코 및 남아프리카에 설비수출을 추진하고 있다.
한편 지난 96년 건전지 시장에 참여한 영풍은 이제 마지막 남은 순수 국내 건전지업체라는 자존심을 걸고 안방 전지시장 사수에 목청을 돋우고 있다.
영풍은 우선 국내 유일의 건전지업체라는 점을 마케팅 소구점으로 삼아 청소년층을 적극 파고들 계획이라는 것. 특히 국제통화기금(IMF) 여파로 1회용 건전지 사용에 따른 부담을 느끼고 있는 소비자층을 겨냥, 수십회에 걸쳐 재충·방전할 수 있는 「알카바」 전지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게 영풍의 복안이다.
이 회사는 또 최근 선보인 1차 알칼리전지 「쎈쎌」에도 희망을 걸고 있다. 영풍이 야심작으로 출시한 「쎈쎌」은 현존하는 1차 알칼리전지 중 성능이 가장 우수하다는 게 이 회사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즉 영풍은 이 알칼리전지에 전지사업의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또 하나 최근 영풍의 움직임에서 주목되는 것은 해외시장 개척 노력이다. 이 회사는 최근 수출전담 조직을 설치, 일본·캐나다·독일·이탈리아 등지로 「알카바」 전지를 실어낸다는 부푼 꿈을 설계하고 있다.
98년 한해가 국내 건전지업계에게는 암울하면서도 미래를 다시 설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의미있는 해로 저물어 가고 있다. 특히 이들 건전지업체는 자의반 타의반 세계 건전지 시장으로 편입된 국내 시장을 외국업체에 내주는 반면 더 큰 세계 시장을 향해 힘차게 도약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희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