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서비스
올해를 결산하는 정보통신정책 및 서비스의 키워드는 「시장」이다. 기간통신산업이라는 말이 상징하듯 지난 1백여년의 우리나라 통신역사는 국가가 주도하고 운영하는 관주도의 독점형 구조를 유지해왔다. 이것이 지난 96년 이후 정보통신 경쟁체제 도입을 겨냥한 신규 사업자의 무더기 허가를 거쳐 올해는 시장이라는 「정글」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진정한」 시장경제체제로 전환됐다.
마침 신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책진용 역시 물갈이됐고 배순훈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대표되는 시장경제 신봉자들은 모든 가치를 시장원칙에 두었다. 공정경쟁을 저해할 만한 규제는 완화가 아니라 아예 없애버리자고 외쳤고 이는 그대로 이행됐다. 정부가 심판의 역할에 머물겠다는 정책의지를 처음으로 수립, 관철해나갔다.
이러한 기조 위에서 정부의 정보통신정책은 크게 두 갈래로 진행됐다. 하나는 시장경쟁이라는 전장(戰場)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진입 및 퇴출 장벽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전투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한 병참지원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것이었다.
진입·퇴출 장벽은 각종 통신서비스에 대한 규제를 최소화하거나 철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위성통신이 시작됐고 별정통신이 탄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최초의 퇴출사업인 시티폰(한국통신 인수) 처리에도 이 기준이 적용됐다. 엄격하게 금지된 기간통신사업자간 양도·양수 역시 그것이 시장 독과점으로 연결되지만 않는다면 허용하도록 법안을 손질했다. 방송과 통신의 융합이라는 기술추세에 맞춰 역무 제한규정도 탄력적으로 적용했다.
정부의 또 다른 역할인 병참지원이란 외자유치였다. 비단 정보통신분야뿐 아니라 국내 모든 산업계가 국제통화기금(IMF) 한파로 현금 유동성 부족 등 극심한 자금경색으로 졸지에 부도위기에 처한 것에서 출발했다. 법적으로 외국인 양도가 불가능한 기간통신사업자들을 회생시키기 위해 정부가 빼는 칼이 외자유치였던 것이다.
특히 정부는 고스란히 빚으로 변하는 차입금 형태가 아닌 지분매각을 통한 외자유치를 선택했다. 장관 이하 주요 실국장들이 직접 해외에 나가 투자설명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틈만 나면 외국기업인들을 만나 투자유치를 설득했다. 물론 투자환경 조성과 시장경제 원칙이라는 우리 정부의 확고한 정책방향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결과는 전 산업분야에서 정보통신업계가 가장 모범적이고 성공적인 외자를 도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미 LG텔레콤·한솔PCS가 6억달러가 넘는 외자를 도입했고 한국통신프리텔·SK텔레콤·데이콤 등이 외자유치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대로 가면 연말까지 기간통신사업자들의 외자유치액이 20억달러를 상회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정부가 약속한 기간통신사업자의 외국인 지분한도 확대(49%) 문제가 현재 국회에 계류된 채 통과가 불투명한 것은 옥에 티로 평가된다.
1백년간 정부규제에 익숙해져 있던 사업자들은 처음에는 정부의 의도를 반신반의했으나 시대적 흐름이 시장경쟁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실제 전장(戰場)에 내몰린 채 치열한 백병전을 펼쳤다.
전쟁이 격화되면 자연히 승자와 패자가 엇갈린다. 의학과 기술 발전의 원동력이 전쟁이었듯 뜻하지 않는 수확도 거두어들인다. 올 한해 최대의 승리자는 이동전화였다.
한국통신프리텔·LG텔레콤·한솔PCS 등 재벌기업들이 이 시장에 뛰어들면서 시장에서의 진검승부가 펼쳐졌다. 자본력을 앞세운 무한경쟁으로 치달았지만 오히려 이동전화 성장의 폭발을 가져왔다. 당초에는 SK텔레콤과 신세기통신이 장악하고 있던 시장에서 서로의 가입자를 빼앗아오는 땅 따먹기 경쟁이 예상됐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동전화사업자가 난립하면서 가입자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늘어났다. 전체시장의 파이가 늘어났고 이제는 5개 사업자가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한 가입자를 확보했다.
개인휴대통신(PCS)은 서비스 실시 한해 만에 6백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휴대폰도 7백만명을 훨씬 넘겼다. 이동전화시장이 5백여만명에 불과했던 지난해와 비교할 때 두배 이상 팽창한 것이다. 이제는 우리나라 국민 가운데 4명에 1명꼴로 이동전화를 사용할 지경이 됐다.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이동전화공화국」이 됐다고 표현한다. 진정한 시장경쟁이 창출해낸 부산물이다.
최대의 패배자는 이동전화의 위세에 눌려 힘 한번 못쓰고 후퇴를 거듭한 무선호출이다. 지난 수년간 「황금알 낳는 거위」로 불리면서 가장 짭짤한 수익을 챙겼던 무선호출업계는 올들어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에까지 몰렸다. 이동전화가 무선호출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대부분 커버하고 사용요금 역시 비슷한 수준까지 끌어내려 가입자 이탈이라는 쓴 맛을 봐야 했다. 무선호출 가입자는 지난해 1천5백만명을 정점으로 올해 급강하, 1천만명 선이 무너졌고 이런 감소세가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다.
다급해진 무선호출업계는 양방향 삐삐를 비롯, 정보단말기로의 변신을 모색하는 동시에 역무침해를 이유로 이동전화사업자들의 제소를 검토하는 등 극한 반발을 보이고 있지만 그 어느 것도 뾰족한 해결책이 되지 못해 속만 끓이고 있다. 무선데이터·주파수공용통신 등 틈새 서비스도 이동전화 광풍에 휘청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올해 처음으로 서비스에 나서면서 국지전(局地戰)을 벌여봤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수세에 몰린 것은 지난 1백년간 통신서비스의 맹주자리를 차지해왔던 유선전화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분야는 새로운 서비스들이 속속 등장, 그나마 위안으로 삼고 있다.
전체 시내전화 가입자수는 지난 10월말 현재 2천만명. 이동전화가 1천3백만명을 돌파하고 1천5백만 고지를 향해 진군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가입자 감소세가 계속되는 우울한 한해를 보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유선 전체에 드리워진 그늘에도 불구하고 사업자별로는 명암이 교차했다는 사실이다. 한국통신과 데이콤은 사상 처음으로 유선(시외전화)시장에서 경쟁을 벌였다. 양사가 지난해말 사전선택제 실시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선발주자와 후발주자가 80대20의 시장점유율을 보이면 경쟁체제 도입이 성공적이라고 분석됐지만 결과는 데이콤의 완패였다. 데이콤은 가입자 기준으로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는 한국통신과 특별한 차별화 없이 저렴한 가격만을 내세운 데이콤의 전략적 판단 미스도 원인이지만 더 정확히는 1백년 만에 최초로 경쟁자를 맞게 된 한국통신이 위기상황을 인식하고 응집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통신은 유선전화시장에서 여전한 지배력을 과시했다. 온세통신의 등장으로 사업자가 3개로 늘어난 국제전화 역시 한국통신의 영향력은 건재했다.
유선사업자의 최대 고민은 무선의 맹추격을 막아낼 만한 마땅한 묘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선시장이 떠오르는 오전 11시의 태양이라면 유선은 기울어가는 오후 2시의 해가 되고 있다. 다행스런 것은 유선사업자들이 이같은 상황인식을 토대로 데이터통신을 전략품목으로 설정하고 집중투자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올해는 특기할 만한 사건도 많았다. 외형상 팽창일로에 있는 이동전화사업자들의 과잉 중복투자 시비, 수익성에 대한 의문 제기, 기간통신사업자들의 외국인 및 동일인 지분한도 확대와 폐지에 따른 숨어있던 주인의 등장, 한글과컴퓨터 사태에 대한 정부의 세련되지 못한 대처와 이에 따른 여론의 비난, PCS사업자 선정과 관련해 부처 창설 이래 가장 큰 사정의 칼을 맞은 정통부 등이 그것이다.
<이택기자 etyt@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