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역사상 뚜렷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 가운데 갈릴레이(1564∼1642)가 있다. 그는 중세까지 널리 진리로 믿었던 천동설 대신 지동설을 주장해 종교재판을 받았고 또 지구 중력을 실험하기 위해 유명한 피사의 사탑에서 쇠로 만든 공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유명한 일화들은 후세 사람들이 각색한 것일 뿐, 실제 사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움직일 수 없는 진리로 받아들였던 천동설, 즉 태양을 비롯한 온 우주가 지구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생각은 16세기에 이르러 코페르니쿠스(1473∼1543)에 의해 도전받게 된다. 갈릴레이보다 앞 세대였던 그는 교회의 권위가 두려워서 사망하기 직전에야 자신의 저서가 발표되도록 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세상에 알려지자 이탈리아의 브루노(1548(?)∼1600)가 그 생각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는 천문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지만 자신의 소신 때문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고야 말았다. 교회의 미움을 사서 종교재판을 받았으며 끝내는 파문을 당하고 화형에 처해졌던 것이다.
갈릴레이는 최초로 천체망원경을 이용해 천문관측을 한 사람이다. 그는 육안 관측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에서 관측을 하여 그 자료를 분석하면 할수록 지동설이 옳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그는 독실한 신자여서 교회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있었지만 결국 70세가 다 된 나이에 지동설을 지지하는 저서를 출간해 마침내 종교재판을 받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1단계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고문을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고문 도구들을 보여주면서 그 방법과 결과를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갈릴레이는 결국 자신의 뜻을 굽히고 말았지만 재판정에서 고개를 숙인 채 조그맣게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과장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법정 모독죄에 해당되어 그 즉시 가혹한 형벌을 받았을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이미 70대의 쇠약한 노인으로 오랜 재판에 지칠대로 지친 그가 그런 용기를 냈을 리 만무하다는 해석이다.
그가 재판정에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렸다는 얘기는 그때로부터 1백년도 훨씬 더 지난 1700년대 중반에야 나온다. 게다가 그 기록도 재판정이 아니라 풀려난 뒤 밖에 나와서 땅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이건 움직여」라고 말했다는 내용이다.
갈릴레이의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는 피사의 사탑 실험. 당시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더 빨리 떨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중력 가속도는 모든 물체에 균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무게가 10배 가량 차이나는 쇠공 두 개를 들고 피사의 사탑으로 올라가 동시에 떨어뜨렸다. 물론 두 공은 동시에 바닥에 떨어졌다. 1590년의 일이라 한다. 그런데 이 실험에 대한 얘기는 그로부터 60년이 훨씬 더 지난 1654년에야 나온다. 「비비아니」라는 사람이 쓴 갈릴레이 전기에서 처음 소개됐다.
아무튼 그 실험은 큰 관심을 끌었을 것이 틀림없지만 당시 어느 누구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며 심지어 갈릴레이 자신도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슷한 실험을 갈릴레이보다 앞서 스테빈이란 사람이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일화들의 근거가 불확실하다고 해도 갈릴레이의 뛰어난 업적이 조금이라도 빛이 바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박상준·과학해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