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북한으로 가자.」
「햇볕론」으로 대표되는 남북경제협력 활성화 정책이 지난해 금강산 관광사업으로 결실을 맺으면서 전자·정보통신업체들이 북한으로 향하는 신발 끈을 다시 묶고 있다. 금강산 관광사업을 성사시킨 현대를 비롯해 삼성·LG 등 대기업들은 대북라인과 조직을 재정비하고 북한에 대한 현지조사를 추진하는 등 북한측과 활발한 「물밑접촉」을 벌이고 있다. 현대는 금강산 관광사업을 협의하면서 북한측과 직접 해주지역에 2천만평 규모의 서해공단 건설을 추진하고 있고 삼성은 북한 아태평화위측과 해주나 남포지역에 전자복합단지를 조성하는 문제를 협의하고 있다. LG도 홍콩 및 북경 주재원이 북한측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사업확대를 모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 등 중소기업 관련 단체들을 중심으로 한 중견·중소기업들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기협중앙회는 지난해 말 박상희 회장을 비롯, 회원사 대표 10여명으로 구성된 투자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해 조선민족경제협력연합회와 남북협력을 위한 5대 기본사항에 합의하는 등 활발한 협력활동을 벌이고 돌아왔다. 또 전자공업협동조합도 임가공을 비롯한 북한 현지생산 업체수를 현재 4개사에서 내년 중 3개 업체를 추가해 전체 7개사로 늘리는 등 북한에 진출하는 중소 전자업체를 계속 늘려 나갈 계획이다.
한국무역협회가 최근 국내기업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남북경협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기업 가운데 88%는 장기적으로 산업 구조조정 차원에서 대북투자와 남북경협을 확대할 의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기업들이 남북경협에 대한 의지가 높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처럼 기업들이 남북경협에 기대와 함께 경쟁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은 북한과의 경제협력을 통해 단기적으로는 인건비 절감을 통해 수익성을 높이고 장기적으로는 중국시장 진출과 통일에 대비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것이다.
남북한 사이에 경협 물꼬가 트인 지는 올해로 벌써 11년째다. 지난 88년 북한 물자가 반입되면서 한때 북한 진출 붐이 일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정치적 이유로 남북경협이 중단되기 일쑤였다. 때문에 남북경협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고 북한과 교역을 추진하던 업체들도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조심스럽게 진행해온 게 사실이다.
지난해 말 현재 북한측과 투자를 합의해 통일부가 북한과 경제협력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준 「협력사업자」는 총 36개 기업이다. 이중 승인을 받아 북한으로 투자자금을 보내 북한내 공장설립이 가능한 기업은 12개 기업이다. 그러나 실제 투자가 성사돼 생산에 들어간 것은 대우가 합영회사를 설립, 지난 96년 8월부터 가동에 들어간 「민족산업총회사」가 유일하다. 그만큼 투자실적이 아직 미미한 실정이다. 여기엔 북한의 소극적인 자세와 투자제도 미비 등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도로·항만·공항 등 인프라 시설의 낙후와 극심한 경제난도 투자를 가로막는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북한은 지난해 9월 시장경제로 가는 「장치」를 마련했다. 헌법개정을 통해 △부분적인 사유재산제 수용 △난진·선봉특구 활성화 △자본주의 경영기법 등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이는 쇄국에서 벗어나 개방과 외자유치 등 본격적인 경제개발에 나서겠다는 신호탄으로 해석돼 남북경협의 새로운 전기를 가져오기에 충분하다.
전자·정보통신분야 남북경협은 타분야에 비해 활발한 편이다. LG상사가 지난 96년 하반기부터 북한 평양에 있는 「대동강 테레비죤 애국천연색공장」을 통해 20인치 컬러TV를 임가공 형태로 생산, 국내로 반입해 LG전자 판매망을 이용해 시판하고 있다.
LG외 극동음향·한국단자·삼화텍콤·인터엠 등 전자공업협동조합 회원사 4개 업체도 북한에서 관련제품을 임가공 생산해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하지만 교역물량은 미미하다. 남한 전자업체들이 북한에 임가공방식으로 거래하는 공장은 주로 평양지역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교통과 인력, 전력수급 등에 있어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 전자업체들이 추진하는 남북경협은 북한 공장에 관련부품을 주어 임가공하게 하거나 공장을 빌려 국내에서 생산설비를 가져가 설치하고 생산하게 하는 형태다.
그러나 앞으로 현대가 해주지역에 중소기업 전용공단을 설치하고 삼성이 해주나 남포지역에 전자복합단지를 조성할 경우 남북경협의 새 장이 열리는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경제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우리측으로는 IMF시대를 맞아 유휴시설를 국토 전역 재배치 차원에서 북한으로 옮기고 북한의 우수한 노동력을 활용, 경쟁력 있는 제품을 생산해 내면 경제회복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현대나 삼성이 북한에 추진하는 전자제품생산, 자동차조립공장 건설이 현실화된다면 수년내 한반도에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
산업연구원은 북한에 진출할 수 있는 유망업종으로 가전제품 가운데 흑백TV, 컬러TV 조립, 라디오, 선풍기, 단순조립 전기·전자 부품 등을 들고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도 올해 남북교역의 방향에 대해 유휴설비 이전을 통한 위탁가공 등 현단계에서 사업수행이 쉬운 부문부터 추진해야 한다고 보고 단순조립형 전자제품 등을 경협 성공가능성이 높은 품목으로 꼽았다. 이들 제품은 국내에서 생산하기에 이미 가격경쟁력을 상실한 제품들로 생산라인을 북한으로 이전할 경우 저렴한 인건비 등으로 경쟁력을 다시 갖게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지난 95년부터 3년간 북한을 상대로 경제협력 활동을 해온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 박병찬 부장은 『남북 경제협력이 본격화한다면 월남전과 중동건설 붐을 계기로 우리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경제가 새롭게 발전할 수 있는 일대 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부장은 만약 육로가 열린다면 남북경협의 가장 큰 애로사항이 되고 있는 물류비용 문제가 해결돼 남북교역은 양과 질적인 면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통신분야의 협력도 유망한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통신은 통일에 대비해 대북 통신분야에 직접 진출하는 적극적인 전략을 추진할 계획이다. 남한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북한의 통신시장은 포화상태에 있는 남한의 통신산업이 새롭게 진출할 수 있는 매력적인 시장이다. 컴퓨터분야도 남북경협이 가능한 분야로 꼽히고 있다. 남북 기술교류가 이루어질 경우 상업화 기술에 앞선 남한과 군사 등 기초과학 분야에 앞서 있는 북한의 기술이 상호보완적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의 컴퓨터산업은 남한의 80년대 중반 수준으로 90년대 들어 16비트와 32비트 컴퓨터를 조립, 생산하는 정도로 하드웨어 부문의 자체 개발능력은 매우 낮다. 또 컴퓨터 보급률도 저조해 노동당과 국가보위부, 은행, 대형기업들이 주로 사용하고 있고 최근에는 일부 학교에 컴퓨터를 보급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북한은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나름대로 개발성과를 올려 스스로도 「상당한 기술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과의 경협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정부가 지난 4월 30일 각종 규제완화와 민간기업의 자율성 제고를 핵심으로 하는 내용의 남북경협 활성화 조치를 발표, 일단 경협 활성화를 위한 기본여건은 마련됐다. 하지만 IMF이후 기업들이 남북경협에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이 많이 위축된 데다 북한측에서 이렇다할 태도의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는가 하면 경협을 위한 제도적 여건이 미비하다.
북한은 체제에 대한 악영향을 우려해 남북경협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수송로와 통신시설도 갖추어져 있지 않다. 또 남북경협에 나서고 있는 기업에 대해 융자 및 손실보전장치, 수출보험, 청산결제방식 및 투자보장장치 등이 필요하나 이러한 제도들이 아직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김병억기자 be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