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특집> 새해 극장가

 새해 영화관은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대형 영화)가 없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한국영화들의 좋은 출발(흥행)이 예상되고 있다. 이와 함께 상당수의 비주류 예술영화들이 1∼2월 영화관 틈새시장을 비집고 들어갈 태세다.

 이같은 현상은 작년과 달라진 할리우드의 영화제작 풍토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지난해 할리우드 영화계는 「타이타닉」 「고질라」 「아마겟돈」 등 제작비가 1억∼2억달러에 이르는 초대형 영화에 경쟁적으로 매달렸다. 그러나 올해는 적은 투자로 큰 성공을 거뒀던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20세기폭스)와 같은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기를 기대하는 모습이다.

 우선 한국영화로는 지난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해 연말 흥행전선을 달려온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명필름),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삼영필름), 「미술관 옆 동물원」(씨네2000) 등이 새해 연장상영을 노리는 한편, 「태양은 없다」(우노필름), 「닥터 K」(프리시네마), 「철인사천왕」(B29엔터프라이즈),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지맥필름), 「쉬리」(강제규프로덕션) 등이 쉴새없이 1∼2월의 영화가에 내걸릴 전망이다.

 1일 개봉하는 우노필름의 「태양은 없다」는 「비트」로 자신의 영상감각을 널리 알린 김성수 감독의 작품. 단 4박5일 만에 4백컷에 이르는 촬영을 끝냈는데, 들고찍기(핸드헬드)·고속촬영·교차편집 등을 통해 사실적이고 역동적인 영상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우성과 이정재가 주연을 맡았다. 10∼30대 초반의 관객을 유인할 것으로 보인다.

 16일에는 프리시네마의 「닥터 K」와 B29엔터프라이즈의 장편 애니메이션 「철인사천왕」이 개봉될 예정이다. 「닥터 K」는 유학파 신인감독 곽경택의 지휘 아래 차인표·김혜수·김하늘 등이 출연한 영화. 회생불가 판정을 받은 어린 환자들을 잇따라 살려내는 능력을 발휘하는 레지던트 강지민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그렸다. 일신창투가 배급한다.

 「철인사천왕」은 다양한 입체적 장면묘사가 가능한 3D 애니메이션과 따뜻한 느낌을 주는 셀 애니메이션을 융합, 「2.5D」 또는 「디지셀」이라고 이름붙인 영상제작기술로 만들어진 영화. 로봇과 요괴가 등장하는 SF 애니메이션이다.

 이어 한국형 공상과학영화(SFX)를 표방하는 지맥필름의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이 1∼2월 중에, 한국형 액션 블록버스터를 표방하는 강제규프로덕션의 「쉬리」가 2월 13일에 개봉할 예정이고, 신생 영화사 쿠앤씨의 「연풍연가」, 씨네2000의 「마요네즈」, 태창흥업의 「화이트 발렌타인」 등의 멜로드라마들도 같은 시기에 개봉될 예정이어서 새해 벽두의 한국영화계가 제법 풍성한 결실을 맺을 것으로 기대된다.

 외국영화 중에서는 지난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한 브에나비스타의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와 1일 개봉하는 20세기폭스의 「비상계엄」이 그나마 블록버스터로 분류할 만한 영화다. 그러나 외국영화들의 위세는 전반적으로 작년에 비해 크게 꺾였다. 두 영화는 할리우드의 고전적인 메뉴인 미국 내 특수정보기관과 FBI, 테러 등을 배경으로 삼고,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 반전과 현란한 액션으로 포장돼 있다.

 그 사이 할리우드에서 생산됐지만 영화의 내용은 할리우드류가 아닌 비주류 영화들과 미국 이외 지역의 영화들이 잇따라 한국에 상륙해 예술영화 마니아 및 가족 단위 관람객들을 유혹한다.

 2일 개봉하는 나디아 데스 감독의 「에이미」(Amy/PMC)는 호주산 최루성 가족영화. 아버지의 영향으로 노래를 통해 세상과 이야기하는 꼬마 에이미(엘레나 드 로마)의 천진함과 호주의 아름다운 자연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9일 개봉하는 「에버 애프터」(Ever After/수입배급 20세기폭스)는 신데렐라 이야기의 최신 버전. 감독 앤디 테넌트는 신데렐라를 여성해방 전사로 만들었다. 이 영화의 신데렐라는 요술 할머니와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지 않고, 인권문제로 왕자와 논쟁을 벌이며, 왕자를 주체성 없는 인간으로 몰아세운다. 속칭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극복한 영화다. 드루 배리모어, 안젤리카 휴스턴이 주연했다.

 같은날 고전영화인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율가필름)가 세번째 수입돼 상영되는 점도 예년의 신년 극장가에 비춰 이례적인 현상이다.

 16일 개봉하는 「스텝맘」(Stepmom/컬럼비아트라이스타)은 「나홀로 집에」와 「미세스 다웃파이어」에서 재미있는 가족용 영화제작 솜씨를 선보였던 크리스 컬럼버스 감독의 신작. 수잔 새런든·줄리아 로버츠·에드 해리스 등을 내세워 가벼운 웃음과 함께 따뜻한 이야기를 펼친다.

 23일에는 「이브의 시선」(Eve’s Bayou/하명중영화사)을 볼 수 있다. 여류감독 케시 레몬스는 10살짜리 흑인 소녀의 시선을 통해 미국내 흑인 여성들이 가진 삶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아버지가 만들어내는 고통을 할머니·어머니·고모·언니 등이 어떻게 극복해가는지를 보여준다. 새뮤얼 잭슨·린 위필드·데비 모건 등이 주연했다.

 같은날 독일산 영화로 제2회 부산영화제의 월드판타스틱 시네마부문에 출품됐던 톰 카티에 감독의 「롤라 런」(Run Lola Run/한아미디어)도 개봉한다. 독일 언론은 이 영화를 『21세기 독일영화의 희망을 알리는 사건』이라고 극찬했다. 톰 카티에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81분의 상영시간 동안 현란한 영상기교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과감한 화면분할과 애니메이션, 비디오 화면 등을 끌어들여 이야기 구조 자체를 위협하는 연출기교도 주목거리다.

 독특한 시각과 영상감각으로 전세계 영화계로부터 주목받는 실력파 감독들의 작품도 속속 들어온다. 존 맥노튼의 「와일드 싱」(Wild Things/SKC), 존 달 감독의 「라운더스」(Rounders/브에나비스타), 테렌스 맬릭의 「신 레드 라인」(The Thin Red Line/20세기폭스), 닐 조던의 「인 드림스」(In Dreams/CJ엔터테인먼트), 구스 반 산트의 「사이코」(Psycho/UIP) 등이 1, 2월 중에 개봉된다.

 이밖에도 지난 76년 「감각의 제국」으로 칸영화제 대상을 수상했던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후속작인 「열정의 제국」(L’Empire de la passion/율가필름)이 9일 개봉되고, 루이 브뉘엘 감독의 「욕망의 모호한 대상」(That Obscure Object of Desire/백두대간), 작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영원과 하루」(An Eternity and A Day/라스트커뮤니케이션) 등의 예술영화도 잇따라 개봉될 예정이다.

<이은용기자 ey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