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스페이스는 육(陸), 해(海), 공(空)에 이어 제4의 영토입니다. 정보사회와 함께 형성된 이 디지털 공간은 이미 영토가 되기 위한 세가지 전제조건을 다 갖추고 있거든요. 최소한의 점유공간과 경제적 가치, 그리고 정치적인 가치가 그것이죠. 인터넷 도메인네임을 갖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사이버영토의 소유자임을 입증하는 부동산 등기나 다름없는 것이니까요.』
건국대학교 사회복지학과 허만형 교수는 틈만 나면 학생들에게 사이버스페이스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21세기는 싫든 좋든 누구나 이 가상공간을 외면하고는 살 수 없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콜로라도주립대학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강단에 섰던 지난 92년부터 「행정정보체계론」 「전자민주주의」, 그리고 「사이버스페이스와 복지행정」은 허 교수의 주된 연구테마다. 그렇다면 과연 사이버스페이스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을까. 허 교수는 지난 95년 이 같은 물음에 대답하는 한 권의 책을 펴냈다. 천재 프로그래머가 가상공간에 사이버 연인을 만들어 놓고 사랑을 나눈다는 내용의 소설 「사이버 베아뜨리체(김영사)」가 그것. 가상공간에서의 사랑에 탐닉하던 주인공은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다 결국 현실을 포기하고 사이버스테이션 속으로 도피한다.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넘나들다 그 경계선을 잊어버리게 되는 거죠. 내가 나비의 꿈을 꾸고 깨어난 것인지, 나비가 꿈 속에서 내가 된 것인지 혼동스러웠다는 장자의 호접몽(蝴蝶夢)이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재현될 수 있다는 가정을 해본 겁니다.』
그때만 해도 사이버스페이스는 낯선 개념이었다. 소설 제목에 사이버라는 말이 쓰였다는 것 자체가 파격으로 받아들여졌을 정도. 「사이버 베아뜨리체」는 가상현실을 다룬 국내 최초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출판계의 관심이 쏠렸지만 판매결과만 놓고 보면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불과 몇 년만에 인터넷을 통해 사이버 결혼을 하는 네티즌들의 풍속도가 사회문제로 떠오르는 것을 지켜보면서 허 교수는 두번째 소설 황금왕국(가제)을 쓰고 있다.
『주인공들은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해 역사의 현장으로 가게 되죠. 초원의 제국을 건설했던 단군조선의 후예들은 한고조에게 나라를 잃고 지금의 삼척으로 옮겨와 실직국을 세웁니다. 그들은 위대한 황금제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신라와 맞서 싸우게 되고 그 과정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실직국 왕자와 신라 공주의 비극적인 사랑이 시작되죠.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가상공간에 들어갔던 젊은이들이 신화에 사로잡혀 결국 현실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게 기둥줄거리입니다.』
잃어버린 고조선의 맥을 따라 고구려, 신라까지 이어지는 원삼국시대를 조명하는 한편 역사를 복원하다가 가상현실의 세계에 갇혀 버린 나약한 도시인들의 모습을 투영시켜 보고 싶다고 허 교수는 말한다.
<이선기기자 sk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