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글 긴생각> 건전한 토론문화

 영어에 「스탬피드(stampede)」라는 단어가 있다. 들소나 양떼가 몰려가다가 앞서가는 몇 마리가 갑자기 방향을 틀면 뒤따르는 이유도 모르고 나머지들도 일제히 뒤를 좇는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다.

 가끔 이 단어가 우리나라 여론의 속성에 꼭 맞아떨어진다고 느껴진다. 강성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 몇 명이 의견을 제시하면 대다수는 침묵하고 그 침묵은 무시된 채 방향이 정해지는 경우가 많다.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리거나 핵심을 들여다보는 사람의 수가 적을 뿐만 아니라 있더라도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대부분 침묵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기아자동차 사태다. 요즘은 아무도 기아자동차에 「국민기업」이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지만 불과 1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기아자동차를 살리자는 목소리가 아니면 몰매를 맞았다. 시장논리와 경제원리대로 처리하자는 일부의 의견은 철저히 외면됐다.

 당시 기아를 살려야 한다는 여론을 이끌던 계층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단순히 특정 재벌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국민기업이라고 부르면서 경영상의 실패에 대한 책임은 간과한 채 기업을 살려야 한다는 여론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요즘은 기아 내부의 문제점이 하나둘 드러나면서 시각 자체가 바뀌었다. 다시 한번 어떤 힘에 의해 여론이 만들어지고 대다수가 영문도 모른 채 그 여론에 동조하고 있다.

 여론의 폭력성이 올바른 의사결정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의사결정권자들은 여론이 올바른 판단에 의해 나왔든 편견에 의해 나온 것이든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여론이라는 명분으로 제기되는 다양한 목소리가 과연 대표성이 있는지 잘 살펴보고 판단을 하여야 한다. 자칫 판단을 흐리게 하고 올바른 의사결정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익명성이 보장되는 사이버공간에서의 여론형성은 더욱 문제가 크다. 익명성 때문에 쉽게 타인을 비방하거나 무책임한 발언을 한다. 사이버공간에서의 여론 역시 일부 폭력적인 소수에 의해 좌우되기 쉽다는 반증이다.

 대부분의 네티즌에게 나쁜 영향을 줄 우려도 있다. 하나의 이슈가 터지면 강성 목소리를 내는 몇몇 네티즌들이 전체 분위기를 한 곳으로 몰아가고, 반대의견을 개진하려면 원색적인 욕설과 갖은 모욕을 감수해야 한다. 소수의 의견들은 「전체 네티즌의 이름으로」 철저히 유린당한다.

 간혹 이런 일부 강성 네티즌의 발언이 「네티즌의 생각」이라는 명목으로 언론지상에 발표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몇몇 사람에 의해 발언되는 것이 반드시 전체 네티즌의 목소리는 아니다.

 사이버공간은 「자유롭다」는 본질적인 특성에다 이제까지 이처럼 자기 주장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는 점 등 때문에 일종의 「배설구」 노릇을 하곤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민주주의를 학습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이를 잘 활용하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혜안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 반대의견도 경청하고 소수의견을 존중하면서 싸움이 아닌 건설적인 토론이 가능해야 한다. 반론을 수긍하고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자기 의견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건전한 토론문화의 전제조건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는 것이 여론이다. 여론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어느날 갑자기 이게 아니다 싶어도 때는 이미 늦고 만다.

 침묵하는 대다수 가운데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한 사람이 있다면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의견을 밝혀 여론의 물길을 바르게 돌려놓을 수 있는 용기 있는 목소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허진호 아이네트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