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의 독주는 계속될 것인가. 한 해에 2백62억달러를 벌어들이는 반도체 공룡 인텔. 하지만 무적함대로 보이는 이 회사의 방어전략에도 몇가지 허술한 점은 있다.
우선 차세대 칩 펜티엄Ⅲ 발매를 앞두고 인텔은 소비자들의 마음을 읽는 데 실패했다. 반도체업계에서 누려온 독점적 지위에 대한 심리적 저항감을 부추기는 실수를 저지른 것. 이 회사는 칩 하나하나에 주민등록번호처럼 고유한 시리얼넘버를 부여할 계획임을 밝혔고 이는 곧 인텔불매운동이라는 결과를 불러왔다.
인텔의 원래 의도는 PC사용자가 펜티엄칩의 고유번호를 인터넷이나 로컬 네트워크로 전송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줌으로써 전자상거래를 위한 보안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것. 칩 자체를 신분증명으로 활용할 경우 소프트웨어에만 시큐리티를 맡기는 것보다 훨씬 안심이 된다는 논리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칩ID만으로 사용자를 알아낼 수 있다면 이는 곧 프라이버시 침해로 연결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예컨대 직원들이 전자상거래 사이트에 들어가 어떤 상품과 서비스에 돈을 지불하는지 회사가 추적해낼 위험이 있다는 것. 네티즌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미디어 중 하나인 ZD넷이 인텔의 발표 직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6백명의 독자들만이 인텔의 아이디어에 대해 「멋있다(Cool)」고 답한 반면 1만6천명은 「소름끼친다(Creepy)」는 반응을 보였다. 워싱턴의 「전자 프라이버시」와 뉴저지 그린브룩 소재 「정크 버스터스」사 같은 소비자권익 옹호단체들은 펜티엄Ⅲ칩을 「유해한 독성 하드웨어」로 부르며 불매운동을 선언했다.
이처럼 거센 반발에 부딪히자 인텔은 즉각 뒤로 물러섰다. 당초 PC를 켤 때마다 자동으로 인식되는 펜티엄Ⅲ의 ID를 지우려면 매번 수동조작이 불가피했던 것을 사용자가 원할 경우에만 이 기능을 살리는 방향으로 수정하기로 한 것.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 로고 대신 빅 브라더 인사이드(Big Brother Inside)를 새겨넣어야 될 것』이라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소비자들이야말로 인텔의 순항을 가로막는 역풍이 될 공산이 크다.
최근 미 현지언론이 지적한 시장점유율 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에서 인텔의 98년 4·4분기 시장점유율은 75.7%였다. 이는 97년 같은 기간의 87.1%보다 11.4%나 내려간 수치. AMD가 6.6%에서 15.5%로 올라선 것과는 대조적이다.
트랜스메타(Transmeta)사처럼 인텔의 아성에 도전장을 던지는 겁없는 벤처업체들의 등장도 무시할 수만은 없다. 트랜스메타는 선사의 스팍 마이크로프로세서팀 출신 데이비드 디첼(David Ditzel)과 리눅스 개발자인 리누스 토발즈(Linus Torvalds)가 이끄는 실리콘밸리의 신생업체. 이 회사는 억만장자 폴 앨런의 후원 아래 속도가 빠르고 다중 OS를 지원하는 혁신적인 칩으로 인텔에 맞설 것을 공언하고 나섰다.
PC 외의 임베디드칩시장에 대한 인텔의 대응이 민첩하지 못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새로운 밀레니엄에는 정보가전시장이 PC를 압도하고 인터넷의 속도가 PC보다 중요해질 것으로 예측되는 만큼 반도체업계의 판도변화가 가능하다. 또 마이크로소프트를 비롯해 IBM·컴팩·HP·디지털이퀴프먼트·인터그래프 등과 불화설이 새어나오고 있는 것도 좋은 징조는 아니다.
물론 이같은 몇가지 증후군 때문에 인텔이 흔들린다고 말한다면 침소봉대가 아닐 수 없다. 암호명 「쿠퍼마인」 「윌라메트」 「포스터」로 이어질 인텔 칩의 진화는 올 연말쯤이면 지난해보다 2배 빠른 제품을 같은 가격으로 살 수 있게 해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영원한 승자가 없는 첨단기술 경쟁의 정글에서 인텔이 언제까지 맹주의 자리를 지킬 것인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이선기기자 sk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