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기술과 문명

정자춘 보광미디어 사장

 미국 실리콘밸리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82번 도로인 엘 카미노 리얼(El Camino Real) 거리를 달리다 보면 유쾌하기도 하고 미국인들의 치밀함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다. 팔로 알토(Palo Alto)시의 핸슨 웨이(Hansen Way)에서 한국 마켓이 밀집해 있는 산 토머스(San Tomas) 고속도로 교차점까지는 대략 50여개의 교차로나 신호등과 마주치게 되는데, 10번 정도 신호를 받아서 멈추게 되고 평균 신호대기 시간은 20초 정도다. 거리는 12마일인데 걸리는 시간은 15∼20분 정도다. 평범한 것 같으나 깊이 들여다 보면 미국의 공학기술과 엄청난 합리적인 논리가 숨어 있음을 발견하고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이크로컨트롤러(MCU)와 센서기술을 활용하면 교차점에서 발생할 수 있는 수백 가지 규칙을 정보화하여 교통의 흐름을 원활히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좌회전하는 차가 없으면 직진신호를 계속 주고, 차량의 흐름이 없을 때는 재빨리 다른 방향의 차량을 파악하여 교통량이 많은 쪽에 흐름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 교차로에서 신호는 1초 단위가 대단히 중요한데 아무런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 쪽의 신호 대기시간을 최소화하여 불필요한 시간의 낭비를 줄일 수 있다. 이러한 기술은 첨단기술도 아니고 현재 보유하고 있는 MCU와 센서기술을 활용한 응용기술로서 의지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활용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교통신호체계에는 미흡한 점이 너무 많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데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빨간불이 들어와서 30초 이상 멍청히 서있어야 하고, 좌회전하는 차가 없는데 직진신호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느라 30초 이상 기다려야 한다. 교통체증으로 연간 GNP 손실액이 10조원 가까이 된다고 하는데 그 중에 1%만 투자를 해도 상당히 많은 개선을 할 수 있다.

 얼마 전에 한 코미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차량이나 행인도 거의 없는 새벽 3∼4시대의 거리에 카메라가 초점을 맞췄다. 빨간 신호를 제대로 지키는지를 몰래카메라로 촬영해 그런 사람에게 냉장고를 선물로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프로를 보면서 나는 오히려 양심이라는 말이 남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량이나 사람의 통행이 없는 횡단보도에서는 센서 신호체계를 도입하거나 점멸등 등을 사용해서 항상 통행하게 해야 된다. 양심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합리적인 양심을 지키도록 주변 환경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선진국이란 경제력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불합리한 부분이나 개혁이 필요한 곳을 찾아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첨단기술을 도입해야 한다. 그런 환경이 마련되었을 때 사람들은 스스로 법과 양심을 지키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회의 질서와 규칙을 지키며 스스로 그럴 듯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며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주변 환경이 사람들의 그런 천성을 마모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도 이젠 무조건 양심만 지키라는 식이나 원시적이고 졸렬한 법규를 강요해선 안된다. 주변 환경을 개선해 합리적이고 세련된 양심과 법에 따르게 해야 한다. 그런 주변 환경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이라면 어떻게든 그것을 활용하도록 해야 하고 그것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