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으로 모든 제조기반이 무너지고 물자가 부족했던 50년대 후반 군수용 전기다리미를 공급하면서 가전제조업에 뛰어든 코발트전기공업은 지난 40여년간 한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코발트전기는 글로벌 생산을 기반으로 거대한 자금력과 마케팅력을 내세워 내수시장을 공략해오는 다국적 기업들에 몇 년도 안돼 속수무책으로 시장을 내줘야 했다.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반덤핑제소를 진행, 다행히 승소하게 되면서 지난해부터는 다소 숨통이 트였다.
이같은 상황은 비단 코발트전기만이 아니다. 국내에서 주방가전 및 소형가전을 생산하는 중소가전업체들의 대다수는 꽤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사업의 영세성과 시설의 낙후성, 첨단기술력의 미비로 갈수록 외국 선진가전업체들과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다. 더욱이 최근에는 중국산 제품들이 전세계 시장을 장악하면서 국산 제품들은 점점 더 설자리가 좁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소형가전산업이 갈수록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에 대해 가전업계 관계자들은 태동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지적하고 있다.
국내 주방가전 및 소형가전산업의 본격적인 태동은 가전3사와 중소가전업체들간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방식의 거래가 시작된 70년대 후반이라 볼 수 있다.
당시 사업영역을 확대하고 대리점 체제를 본격적으로 육성하기로 한 가전3사는 생활을 편리하게 바꿔주는 각종 소형전기용품들을 개발, 신규 수요 발굴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반적인 제조시설이 부족하고 해당 품목의 수요도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가전3사는 직접 생산라인을 확보하지 않고 품목을 늘릴 수 있는 OEM을 활성화하기로 하고 그동안 거래해왔던 부품업체들을 대상으로 전기용품 제조기술을 이전, 공동개발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우림전자·유닉스전자·국제전열·성광전자 등 수많은 중소가전업체들이 생겨나고 지금의 소형가전산업의 기초가 닦인 것이다.
가전3사는 주도적으로 상품을 기획하고 개발에서부터 디자인 및 금형, 사출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기술지도를 담당하며 판매는 물론 나아가 품질관리 및 AS까지 지원했다.
이는 모두 중소가전업체들로부터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으로 다양한 제품을 납품받아 자사 대리점에 소비자들의 집객률을 높여 매출을 확대하면서도 브랜드 이미지를 직접 관리하기 위한 가전3사의 노력이었다.
80년대 들어 가전3사는 일본제품 대응차원에서 전기보온밥솥·가스레인지 등 주방가전제품에 대해서도 앞다퉈 국산화에 들어갔으며 여기서도 새로운 중소협력업체들을 발굴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가전3사간 경쟁이 펼쳐지면서 가전3사는 자사에 납품하는 중소가전업체들에 독점권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중소가전업체들은 가전3사 중 한 업체만 집중적으로 거래하게 되고 나머지 업체는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지 못하고 단순 납품업체로 전락, 자체 기술력 및 영업력, 수출경쟁력을 확보하기가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신일산업·한일전기 등 일부 중소전문업체들은 모터 등 부품기술력을 바탕으로 선풍기·소형 세탁기·환풍기·난방기기 등을 자체적으로 생산, 독자브랜드와 유통망을 구축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 중소가전업체들은 장기간의 OEM에 독자적인 경쟁력을 상실, 90년대 이후 WTO체제 출범과 함께 유통시장이 개방되면서 급속히 쇠퇴해왔다. 더욱이 97년부터는 가전3사가 소형가전사업을 본격 철수, 협력관계를 단절하면서 많은 중소가전업체들은 20년 OEM역사에 종지부를 찍기도 했다.
지금 중소가전업체들과 주방가전 전문업체들은 전환점에 서 있다. 새로운 천년을 맞아 세계적인 기업으로 재도약하느냐, 아니면 역사속으로 사라지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중소가전업계의 관계자들은 살 길은 오직 「세계화」에 있다고 말한다. 세계 표준에 맞는 품질 및 생산설비를 갖추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경쟁력 있는 제품을 개발하는 것만이 대안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제는 OEM의 구태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업체 스스로 과감한 홀로서기를 시도해야 할 때라는 것이 관련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정지연기자 jyjung@etnews.co.kr>